텅텅 빈 동대문 의류상가…플랫폼 시대, K-보세 산업은 무엇을 잃었나

텅텅 빈 동대문 의류상가…플랫폼 시대, K-보세 산업은 무엇을 잃었나

공실률 2배·시장 20조 성장…엇갈린 보세의 현재
동대문 공실 15%·온라인 거래 연 10%↑

기사승인 2025-12-22 06:00:10 업데이트 2025-12-22 09:42:24
동대문에 위치한 대형 상가 내 공실. 심하연 기자

“여기 일대는 다 망했지, 뭐.”

동대문 인근에서 보세 의류 상가를 운영하는 박모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최근 이틀 동안 박씨가 판매한 옷은 단 세 벌, 매출로는 약 13만원에 그쳤다. 원가를 제외하면 실제 손에 남는 돈은 3만원 남짓이다.

박씨는 “코로나 이후로도 손님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며 “어떤 일시적인 침체를 겪고 있다기보다는, 이 일대 상권 자체가 아예 죽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씨가 체감한 변화는 동대문 상권 전반의 몰락과 맞닿아 있다. 동대문에서 출발한 ‘한국형 보세 시스템’이 온라인 플랫폼 확산과 중국 C커머스 공세 속에서 해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대문과 대학가 상권이 빠르게 무너지며 오프라인 보세는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보세 의류에 대한 소비 자체는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소비가 이동한 자리에서 생산과 유통, 수익 기반까지 함께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동대문 평화시장 상가도 손님이 줄었다. 심하연 기자

‘한국형 보세 시스템’의 출발점, 동대문

동대문은 한때 대한민국 패션 산업의 심장부로 불렸다. 1990년대 후반 연간 10조원 규모로 성장한 데 이어, 2000년대 후반에는 연간 15조 원에 달하는 경제적 효과를 유발했다. 2000년대 초반 동대문을 통해 해외로 수출된 의류 판매액은 연간 2조원을 넘겼다.

동대문 상권은 1998년 밀리오레 개장과 1999년 두산타워 출범을 마지막 전환점으로 소매 중심 대형 쇼핑몰 시대로 재편됐다. 밀리오레가 10대 소비자를 끌어들이며 트렌드 소비 공간으로 확장했고, 두산타워는 ‘낮에는 소매, 밤에는 도매’ 방식으로 24시간 유통 구조를 정착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대문은 제조·유통·소매가 결합된 종합 패션 클러스터로 성장하며 빠른 기획과 생산, 즉각적인 리오더가 가능한 ‘한국형 보세 시스템’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다 옛말이 됐다. 쇼룸과 점포 공실이 늘어나고 사입 동선이 붕괴되면서, 봉제·원단 상인들까지 상권을 떠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한때 밤낮없이 움직이던 동대문 일대는 팬데믹 이후에도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한 채 침체가 고착화되는 모습이다.

▲ 텅텅 빈 동대문 의류상가…플랫폼 시대, K-보세 산업은 무엇을 잃었나

현장에서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경쟁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동대문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는 A씨는 “요즘은 주문만 하면 다음 날 바로 제품이 들어오는 구조인데, 보세 물량을 떼다가 중국에서 대량 생산해 초저가로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와 만든 제품은 원단 배합이나 봉제 디테일에서 차이가 크다”며 “동대문에서 만드는 옷과는 퀄리티 자체가 다른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 차이만 먼저 보이니 점점 버티기 어려워진다”고 덧붙였다.

동대문 대형 의류상가 업계에서는 신생 업체 유입이 끊긴 점을 상권 붕괴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한 대형 상가 관계자는 “제조는 중국에 의존하고 판매는 모두 온라인으로 이뤄지다 보니, 동대문 오프라인 상권으로 들어올 이유 자체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동대문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오프라인 보세 상권의 침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한국부동산원 상업용부동산임대동향조사에 따르면 동대문 일대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2025년 2분기 10.9%에서 3분기 14.9%로 한 분기 만에 4%포인트(p) 상승했다.

대학가 상권도 예외는 아니다. 신촌·이대 상권의 공실률은 같은 기간 8.5%에서 15.1%로 두 배 가까이 뛰었고, 홍대·합정 일대 역시 4.6%에서 14.2%로 급증했다. 혜화 상권도 0.6%에서 3.3%로 상승했다. 팬데믹 이후에도 주요 보세 상권의 공실률이 줄어들지 않으며, 침체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 홍대 인근에 위치한 보세 상가. 1만원~3만원대 저렴한 상품들이 많아 20대 손님들이 많이 찾고 있다. 심하연 기자

대학가까지 번진 보세 상권 붕괴

동대문에서 시작된 변화는 대학가 상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성북구 대학가에서 보세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김모(54)씨는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면 매출이 반도 나오지 않는다”며 “원가는 계속 오르는데, 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도 소비자들이 찾는 보세 가격대는 여전히 1만~2만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예전보다 매출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 날이 많고, 주변에서 함께 장사하던 상인들도 상당수가 이 일대를 떠났다”며 “상권이 이렇게까지 위축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하다”고 말했다.

신촌과 이대 상권도 상황은 비슷하다. 신촌 인근 부동산 공인중개업자 A씨는 “과거에는 이대나 연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인근에서 의류를 소비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비 패턴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며 “상권 전반이 위축되면서 신규 입점을 문의하는 경우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오프라인 안 돼도 보세 수요 여전

오프라인 상권의 침체가 곧 보세 소비의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보세 의류 소비는 테무, 쉬인, 지그재그, 에이블리 등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확대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소비자는 더 이상 동대문이나 대학가 로드숍을 직접 찾기보다 모바일 플랫폼과 SNS를 통해 가격과 트렌드를 비교하며 구매한다.

과거 보세 유통은 동대문을 중심으로 ‘소량 생산–빠른 판매–즉각적인 리오더’로 이어지는 초단기 회전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반면 플랫폼 중심 보세 시장은 대량 생산과 가격 경쟁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소비는 유지되지만, 이를 떠받치던 국내 생산·유통 기반은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패션 유통의 디지털 전환은 경쟁 구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무신사, 에이블리, 지그재그, W컨셉 등 국내 패션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했지만, 2024년 이후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등 이른바 ‘알·테·쉬’로 불리는 중국 저가 플랫폼이 본격적으로 국내 시장에 침투하며 경쟁은 한층 격화됐다.

지난해 2월 기준 알리익스프레스의 월간활성이용자(MAU)는 전년 대비 818만 명 증가하며 국내 쇼핑 플랫폼 최상위권에 진입했고, 테무는 국내 상륙 8개월 만에 580만 명을 모았다. 쉬인 역시 같은 기간 MAU가 300% 이상 급증했다.

오프라인 보세 생태계 붕괴의 여파는 생산 영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동대문이 강점으로 삼아왔던 샘플링 속도와 소량 리오더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브랜드와 셀러들은 점차 중국 OEM·ODM에 의존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초저가·대량 생산에 최적화된 글로벌 플랫폼의 공급망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의류업계 전문가는 “플랫폼 기반 보세 유통이 가격 경쟁력은 확보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내 봉제·원단 산업과의 연결 고리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며 “동대문을 중심으로 작동하던 기획·제조·유통의 유기적 생태계가 무너지면서 생산과 수익이 해외로 이전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특정 상인의 문제가 아니라, 중장년 점주와 봉제 인력의 생계 기반은 물론 신진 디자이너와 소형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완충 지대가 사라지는 과정”이라며 “오프라인 보세 생태계 붕괴로 한국 패션 산업이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플랫폼 경쟁에 직접 노출되는 전환기에 들어섰다”고 분석했다.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는 “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같은 중국 C커머스의 확장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라며 “극단적으로 낮은 가격대는 젊은 세대에게 매우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국내 플랫폼에도 상당한 압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패션업계 관계자는 “보세 상권의 침체를 단순히 오프라인 유통의 쇠퇴로만 볼 문제는 아니다. 성수동 등 새로 떠오르는 패션 소비 지역은 매일 사람이 붐빈다”며 “소비는 플랫폼으로 이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내 생산과 유통, 수익 구조가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동대문을 중심으로 작동하던 한국형 보세 시스템이 해체되면서 신진 셀러와 디자이너가 실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산업적 완충 지대도 사라지고 있다”며 “현재의 흐름은 유통 채널 변화가 아니라, 국내 패션 산업 구조 자체가 재편되는 전환 국면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심하연 기자
sim@kukinews.com
심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