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스폰서 바뀌는 바둑리그…정태순호, 시험대 오른다 [데스크 창]

메인 스폰서 바뀌는 바둑리그…정태순호, 시험대 오른다 [데스크 창]

기사승인 2025-12-24 13:11:48 업데이트 2025-12-24 21:24:58
이영재 문화스포츠부장
바둑은 복싱과 함께 GDP가 낮은 국가에서 흥행하는 종목으로 분류된다. 1970년대 복싱, 1980년대 바둑이 국민 스포츠 반열에 오르면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모두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겪고 있다.

복싱과 바둑은 각각 극한의 신체능력과 지적능력을 1대1로 겨루는 종목이다. 별다른 기반이나 지원이 없더라도 선수 개인의 역량과 의지로 성공 신화를 쓸 수 있다. 복싱 레전드 홍수환의 4전5기 KO 승리, 바둑 황제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 같은 일대 사건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현재는 구단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통해 팀 스포츠로 움직이는 축구와 야구, 농구 등이 전 세계 팬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 

복싱은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MMA(종합격투기)에 사실상 흡수 편입된 모양새다. 국내에서도 MMA의 인기가 날로 커지면서 유소년·청소년 유입이 시나브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 ‘동양 삼국 스포츠’로 이렇다 할 국제 모델이 없는 바둑은 중국을 벤치마킹하며 해법을 찾았다.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에서 사용하는 프로 리그 방식을 도입하면서 기존 개인전 위주에서 벗어나 단체전, 팀 스포츠를 표방하고 나섰다.

중국은 지난 1999년 바둑계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갑조리그’를 창설했고, ‘외국 용병’ 제도를 도입해 바둑을 스포츠로 만들었다. ‘충칭의 별’ 구리 9단이 갑조리그 충칭팀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바둑의 인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기도 했는데, 이는 지역별로 기량이 뛰어난 기사들이 넓게 분포돼 있는 중국의 특성이 작용한 결과다. 

중국 갑조리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급 용병 이세돌 9단은 바둑계 최초로 ‘All Or Nothing’ 문화를 선도하기도 했다. 바둑은 오랫동안 ‘대국료’라는 명목으로 승패와 관계없이 기사에게 일정 수입을 보장해왔다. 마치 복싱의 ‘파이트머니’와 같은 개념으로, 이는 상금과 별도로 경기에 출전하기만 해도 받는 돈이다. 그러나 이세돌 9단은 중국 갑조리그에 출전하면서 “바둑을 지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구단은 이세돌 9단이 승리할 땐 파격적인 금액(2000년대 중반 기준, 1승당 1700만원)을 지급했고, 패하면 실제로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이세돌 9단은 중국 갑조리그 ‘주장전’(중국리그는 4대4 단체전으로, 2:2 승부가 나오면 주장전을 이긴 팀이 승리한다)에서 19연승 신화를 썼고,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리그 최고 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이세돌 9단이 한국바둑리그에서 받은 수당이 1승당 150만원(패배 시 50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였는지 알 수 있다.

2006년 국민은행이 메인 스폰서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KB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20년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다.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중국 갑조리그를 모방했음에도 우리나라 바둑리그는 20년 내내 공전했다. 매년 소문만 무성했던 ‘구단제’(바둑 기(棋)자를 써서 ‘기단제’라고도 한다)는 여전히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신진서 9단을 비롯한 최고의 선수들을 ‘추첨 종이 뽑기’ 방식의 랜덤 드래프트로 선발하는 기묘한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선수들이 매년 바뀌면서 지역 연고제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올해도 지난 9월18일 열린 바둑리그 선수선발식에서 행운의 ‘1번 종이’를 뽑은 한해원 영암 감독이 신진서 9단을 호명하면서 신 9단은 영암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지난해 GS칼텍스에서 활약했던 신진서 9단은 어떤 협상이나 계약도 없이 무작위 추첨에 의해 팀을 옮겼고, 바둑 팬들은 갑자기 바뀐 신진서 9단의 유니폼을 보며 의아할 뿐이다. 지난 시즌 통합 우승을 차지한 영림프라임창호를 제외한 대부분의 팀이 선수단을 ‘리셋’ 했고, 이로 인해 이번 시즌이 반환점을 돌았음에도 팬들은 어떤 선수가 어느 팀에 소속돼 있는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바둑리그 시청률은 점진적으로 하락해왔다. 국민은행이 연간 10억원의 후원금을 지난해부터 7억원으로 대폭 삭감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다. 국민은행은 바둑리그에 7억원, 2부 리그격인 퓨처스리그에 3억원을 후원했는데, 지난해 삭감에 따라 퓨처스리그가 열리지 않았다.

국민은행 후원금이 큰 폭으로 축소되면서 2부 리그가 사라진 사건에 대해 한국기원은 별도 입장 표명이나 대안 마련이 없었다. 취재가 시작되자 한국기원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퓨처스리그는 바둑리그와 연동되지 않는 별개의 리그이므로, 1부 리그인 바둑리그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시즌 바둑리그는 ‘주장 박정환 연속 출전’ 사태가 벌어지는 등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2부 리그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기원은 각 팀에서 후보 선수를 추가로 보유할 수 있도록 조치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결원이 생길 경우 중복 출전이 가능하다’는 신설 규정을 악용한 사례가 전반기에만 무려 4번이나 발생했다. 2부 리그가 있던 시절에는 여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주전 선수가 빠지면 후보 선수가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간혹 하위 랭커들이 ‘대타 홈런’을 날리면서 주목을 받는 사례가 바둑리그에서도 종종 나왔다.

중복 출전 규정의 최대 수혜자는 전반기 1위에 오른 원익이다. 원익은 바둑리그 ‘홍일점’ 김은지 9단이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 등 여자대회 출전으로 자리를 비울 때마다 주장 박정환 9단을 한 경기에 두 번씩 등판시키는 방식으로 승리를 챙겼다. 지난 11월28일 2-2 상황에서 5국에 출전한 박정환 9단은 상대 GS칼텍스가 주전 선수를 모두 투입한 틈을 타 마지막 대국에서 5지명 김승재를 손쉽게 제압하고 팀에 승리를 안겼다. 12월4일에는 영암과의 경기에서 2국에 등판해 승리를 따낸 박정환 9단이 ‘김은지 대타’로 5국에 다시 나와 상대 3지명 심재익을 돌려세우고 팀 승리를 굳히기도 했다.

익명의 바둑 관계자는 “박정환 9단 사례처럼 주장이 중복 출전하는 문제는 바둑리그 출전 선수들 사이에서 이미 논란이 되고 있다”면서 “부득이한 상황에서 중복 출전을 허용하더라도 상대팀 선수의 지명에 맞는 선수가 출전하거나, 혹은 출전하지 못한 선수의 지명을 기준으로 가장 하위 지명 선수가 출전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규정을 손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바둑리그를 주관하는 한국기원 역시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과거에는 신진서·박정환 9단 등 주장이 출전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 시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추후 규정을 보완할 방침”이라고 했다.

정태순 한국기원 이사장. 쿠키뉴스 자료사진

국민은행과 결별한 바둑리그는 다음 시즌 새로운 메인 타이틀 스폰서를 맞이한다. 한국기원 총재로 취임해 현재는 이사장으로 직제를 변경한 정태순 이사장이 바둑리그 후원사 유치에 큰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바둑리그가 갖는 위상은 한국 바둑계에서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이해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바둑리그에 들어가면 한 해 농사를 다 지은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로기사들에게 바둑리그는 중요하다. 한국기원 역시 바둑리그 주관료 수입으로 먹고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표류하는 바둑리그의 키를 잡고 항해를 주도할 선장이 필요한 시점에 정태순 이사장이 등장했다.

정태순 한국기원 신임 이사장은 부총재 시절부터 한국기원에 100억원이 넘는 후원금을 쾌척하는 등 바둑 발전에 진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9월 취임한 정 이사장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데, 첫 번째 무대는 메인 타이틀 스폰서가 바뀌는 바둑리그다. 막바지에 이른 국민은행 바둑리그가 유종의 미를 거두기보다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메인 스폰서를 바꿔 새출발할 다음 시즌은 프로 스포츠다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해야만 한다. 정태순호의 첫 행보에 바둑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