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장의 오랜 법칙이었던 ‘사이클(경기 순환)’이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메모리 업체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설비투자(CAPEX)를 집행하고 있음에도,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편중 현상이 심화하면서 오히려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짙어지는 이른바 ‘메모리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수급 불균형이 일시적 현상을 넘어 구조적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I 인프라 확산이 메모리 생산의 우선순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글로벌 메모리 3사는 공통적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HBM은 AI 서버의 연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수익성과 전략적 중요도가 모두 높은 제품이다.
실제로 메모리 3사는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각각 200억달러 수준으로 확대했다. SK하이닉스는 청주 M15X 신공장에 20조원을 투자하며 월 3.5만~6만장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삼성전자는 평택 P5공장에 60조원을 투자해 월 6만장 추가 생산을 준비 중이다. 마이크론은 미국 아이다호 공장 가동을 앞당기고 일본 히로시마 신공장에 14조원을 투자하고 있다.
그럼에도 공급 부족 현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최근 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의 2026년 설비투자액이 전년 대비 50% 이상 증가하더라도, 실질 생산량 증가는 20% 미만에 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요 급증과 더불어 투자 자금 상당 부분이 신규 생산 확대보다는, 상대적으로 기간이 짧게 소요되는 인프라 구축 및 기존 생산라인의 최신 공정 전환에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신용평가 역시 2026년 메모리반도체 전망 리포트에서 “신규 팹 준공과 안정적인 가동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메모리 수급이 타이트한 상황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HBM 늘수록 범용 메모리는 줄어든다”
이러한 공급 부족의 핵심은 AI 가속기용 HBM의 생산 구조에 있다. HBM은 일반 D램 칩을 여러 층으로 수직 적층해 만드는 방식으로, 동일한 웨이퍼를 투입해도 범용 D램보다 생산 효율이 낮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같은 웨이퍼로 여러 개의 범용 D램을 만들 수 있었지만, HBM 비중이 높아질수록 실제 시장에 공급되는 메모리 물량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HBM은 일반 D램 대비 약 3배의 웨이퍼를 소모하는 데다, 적층 과정에서 한 개의 칩만 불량이 발생해도 전체 패키지를 폐기해야 해 수율이 65% 수준에 그친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장을 풀가동하더라도, 실제 시장에 공급되는 칩 개수는 정체되고 있는 것이다.
또, HBM은 고객사별 맞춤형 설계와 검증이 필수여서 설계부터 출하까지 걸리는 리드타임도 기존 메모리보다 길다. AI 수요가 늘수록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지만, 공급 확대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승자독식’ 굳어지는 메모리 시장…범용 가격도 ‘들썩’
특히 이러한 HBM 편중 현상은 범용 메모리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익성이 높은 HBM에 생산 역량이 집중되면서, 스마트폰·PC·가전·자동차에 쓰이는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공급 여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흐름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서버용 D램 공급이 타이트해지면서 2025년 4분기 범용 D램 고정거래가격이 전 분기 대비 18~23% 급등했으며, 1월 DDR4 고정거래가격은 11.50달러로 10개월 연속 상승 중”이라고 분석했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수급 불안이 특정 산업을 넘어 전자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따라 거래 관행 또한 달라지고 있다. 메모리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단기 가격 협상보다는 중장기 공급 안정성을 중시하는 장기 계약이 늘고 있다. 엔비디아와 구글 같은 빅테크들은 2027년 물량까지 선점하기 위해 수천억 원의 선수금을 지불하는 장기공급계약(LTA)을 맺고 있는 반면, 중소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웃돈을 줘도 물량을 구하지 못하는 ‘승자독식’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 확산은 메모리 시장을 단순한 경기 순환 산업에서 구조적 공급 제약 산업으로 바꾸고 있다”며 “앞으로는 공급 부족을 예외가 아닌 상수로 두고 전략을 짜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