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40년을 살았어. 귀중품이고 뭐고 다 타 버렸는데 설날에 갈 곳이 어디 있겠어.”
화마가 지나간 지 3주째에 접어든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6지구 일대는 사실상 폐허였다. 검게 탄 철골만 남은 집터에는 잿더미가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소된 마을 어귀에 마련된 ‘화재민 쉼터’에서 만난 고재옥(86)씨는 “보상이라도 제대로 됐으면 좋겠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절기상 입춘이었지만, 풀리지 않는 추위에 고씨의 코끝은 붉게 얼어 있었다.
구룡마을 이재민들이 좀처럼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수십 년간 살아온 판잣집이 건축법상 ‘주택’이 아닌 ‘간이 공작물’로 분류돼 분양권 대상에서도 제외됐기 때문이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공고한 이주 대책이 임대주택 중심으로 마련되면서 고령·저소득 주민들에게는 현실적인 부담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화재 이후 별도의 주거 대책 마련 요구가 이어졌지만, 기존 이주 계획만 제시되며 법적 기준과 주민들의 현실 사이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고씨를 비롯한 이재민들은 화재 이후 매일 오전부터 화재민 쉼터를 찾고 있다. SH가 제시한 이주 대책을 둘러싼 논의가 재점화되면서다. 서울시에 따르면 정비사업 대상지인 구룡마을 토지 24만㎡와 비닐하우스 등 물건 1931건은 지난해 8월을 기점으로 SH에 소유권 이전을 마쳤다. 재개발 사업이 예정된 만큼 판잣집이 복구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SH가 2023년 공고한 ‘구룡마을 이주대책 등 기준’에 따르면, 이재민은 재개발 완료 시 임대주택을 공급받을 수 있다. 주거용 무허가 건축물과 비주택 거주자 역시 자격 요건에 따라 도시개발구역 내 임대주택 입주가 가능하다. 공사 기간 임시로 이주하는 주택에 대해서는 보증금을 전액 면제하고, 임대료도 통상 운영 기준 대비 60% 수준으로 책정했다. 이에 따라 지난달 16일 기준 구룡마을 1~8지구 총 1107가구 중 771가구는 이미 이주를 마쳤다.
나머지 336가구 가운데 193가구는 실거주 상태다. 화재가 발생한 4·6지구에만 126가구가 남아 있다. 이재민은 총 181명이다. 강남구가 관내 호텔 2곳을 지정해 단기 거처를 제공했지만 오는 15일이 지나면 퇴소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 이재민은 SH가 확보한 임시이주주택이 아닌 화재민 쉼터에 머물고 있다.
이재민들이 이주를 거부하는 배경에는 장기간 거주 사실을 인정해 입주권 등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재민 대책위원회가 SH에 원주민 재정착 보상이나 ‘임대 후 분양권’ 제공을 요구하는 이유다. 대책위 관계자는 “인근 공공임대주택만 해도 보증금이 8000만원, 월 임대료가 60만원 수준”이라며 “대부분 고령이고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이 임대주택 거주권을 받았다고 바로 입주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대책위는 이재민에게 재정착이 가능한 보상 방안을 마련해 달라며, 그 방안의 하나로 ‘분양전환형 임대주택’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분양전환형 임대주택은 의무 기간 5년 또는 10년 동안 임대료를 내며 거주하면 입주한 주택의 분양권을 우선 획득할 수 있는 방식이다.
다만 SH는 이같은 요구가 현행법 체계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SH 관계자는 “재정착 보상은 관련 규정에 따라 이주비 등을 지원한 상황”이라며 “토지보상법상 분양전환 임대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SH는 법에 따라 집행하는 기관으로, 법을 벗어난 보상을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SH는 공공주택 특별법과 토지보상법에 근거해 허가받은 주택 소유자와 1989년 1월24일 이전에 지은 주거용 무허가 건축물 소유자·거주자에게만 분양권을 제공한다. 구룡마을을 이룬 판자촌 대부분은 건축법상 건축물이 아닌 ‘간이 공작물’로 분류돼 보상 대상이 될 수 없다. 40년 넘게 이 마을에 거주해 왔다는 박순식(81)씨는 “30년 이상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비주택으로 처리됐다”며 “정말 비참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재민과 SH 간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화재민 쉼터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쿠키뉴스가 현장을 찾은 이날 오전 11시쯤 SH가 파견한 토지 관리인과 이재민 사이에서 고성이 오갔다. 재정착 보상을 요구하는 푯말이 등장할 때마다 제지와 실랑이가 벌어졌고, 기자가 지켜본 두 시간 동안 경찰차 3대가 출동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SH가 토지 소유자이자 사업 시행자인 만큼 현장 관리 인력이 필요하다”며 “토지 관리인은 외부인 출입 통제와 순찰 등 관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주 문제가 장기화할 경우 재개발 사업 일정이 지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SH는 구룡마을에 신혼부부 장기전세주택 600가구를 포함해 총 3800여 가구를 공급할 계획이다. 2027년 상반기 착공해 202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아파트 임대·분양을 원하는 시민들이 많은 상황에서 미이주 상태가 이어지면 착공과 완공 시기 모두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남구와 SH는 단기 거처 퇴소를 앞둔 이재민들을 위해 6개월간 거주 가능한 긴급 임시주택 80가구 이상을 확보했다. 구 관계자는 “재난 발생 시 이재민을 지원하기 위한 주택”이라며 “SH가 주택을 확보하고 구가 지원을 요청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책위 측은 “임시이주주택과 긴급 임시주택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입주를 거부하고 있다.
설 연휴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이재민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잿더미가 된 판자촌에 머물러 있다. 40년 넘게 구룡마을에서 살아온 노순표(78)씨 역시 설 명절에 쉼터를 찾을 계획이다. 노씨는 “머리가 아프다”며 “집도 없는데 어디로 가겠느냐”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