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상 너머 설상이 열어젖힌 새 축…‘한국 동계’ 전환점 [취재진담]

빙상 너머 설상이 열어젖힌 새 축…‘한국 동계’ 전환점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6-02-22 06:00:09 업데이트 2026-02-22 09:11:45
빙상은 한국 동계를 지탱해온 중심축이다. 1992년 알베르빌에서 김기훈이 쇼트트랙 첫 금메달을 따낸 이후 한국은 동계올림픽 변방에서 단숨에 중심으로 올라섰다. 이번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전까지 한국이 획득한 동계올림픽 금메달 33개 가운데 32개가 빙상 종목에서 나왔다. 쇼트트랙이 26개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스피드스케이팅이 5개를 보탰다. ‘피겨 여왕’ 김연아의 금메달 1개도 빙상에 포함된다. 한국의 동계 성과는 오랫동안 빙판 위에서 만들어졌다.

한국 동계 스포츠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종목 다변화를 시도했다. 스켈레톤의 윤성빈이 아시아 최초로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따냈고, 봅슬레이 팀 원윤종과 스노보드 이상호가 은메달을 수확했다. 한국은 홈 이점을 살려 17개(금5·은8·동4)로 역대 최다 메달을 기록했다. 다양한 종목에서 성과가 나오며 저변 확대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4년 뒤 베이징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총 9개(금2·은5·동2)의 메달이 모두 빙상에서 나왔다. 빙상 외 종목의 경쟁력은 기대만큼 받쳐주지 못했다. 특정 종목 의존 구조가 다시 부각됐고, 한국 동계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구조적 한계가 확인된 순간이었다.

이번 대회에서도 위기의식은 이어졌다. 빙상의 약화까지 더해져 최악의 성과를 거둘 거란 전망이 잇따랐다. 하지만 설상 스노보드에서 ‘평창 키즈’들이 일을 냈다. 여자 하프파이프에서 최가온(세화여고)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설상 사상 첫 금메달이었다. 17세 3개월의 나이로 해당 종목 최연소 금메달 기록도 세웠다. 해당 종목의 전설인 클로이 김을 제치고 정상에 선 장면은 상징성이 컸다. 이어 여자 빅에어에서는 유승은(성복고)이 동메달을 추가했다. 두 선수는 모두 10대다. 경기력은 이변이나 돌풍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안정적이었다. 기술 완성도와 경기 운영 능력, 국제대회 경험이 균형을 이뤘다. 향후 올림픽 사이클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경쟁력을 보여줬다.

여기에 더해 평행대회전에선 37세 ‘맏형’ 김상겸이 은메달을 더했다. 세대 구성이 분명해졌다. 10대가 패기와 기세를 앞세워 메달권에 진입했고, 베테랑이 경험을 통해 결과를 만들었다. 특정 선수 한 명의 성과가 아니었다는 점은 매우 뜻 깊다.

한국은 이번 대회 설상 종목에서 금3·은4·동3개를 확보했다. 설상이 한국 동계올림픽의 한 축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설상은 한국 동계의 약점으로 분류됐다. 평창에서의 성과도 홈 이점의 영향으로 해석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준비와 축적이 결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선수층이 형성되고 있고, 세대 간 연결도 자연스럽다. 일회성 성과와는 결이 다르다.

빙상의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이번 대회에서도 쇼트트랙이 사상 첫 ‘노골드’ 위기에 몰렸지만, 특유의 집중력으로 여자 계주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김길리는 1500m 금메달을 따내며 2관왕에 올랐다.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이 한국 동계를 이끌어온 역사적 성과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 대회는 그 토대 위에 또 하나의 축이 더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올림픽은 한 국가의 스포츠 체질을 보여주는 무대다. 특정 종목 의존도가 높을수록 국제 경쟁 구도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종목 구성이 다양해질수록 전체 성적의 안정성은 높아진다. 이번 설상 약진은 그런 측면에서 긍정적인 신호다. 투자와 훈련 시스템, 선수층 확대가 맞물리며 구조적 기반이 점차 다져지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분명 참고할 지점이 있다. 일본은 이미 스노보드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대회에 걸린 스노보드 금메달 11개 중 4개를 가져갔다. 일본 선수들의 경기력은 대단했다. 회전, 기술, 착지 등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은2·동3개까지 추가하며 메달 2위 오스트리아보다 무려 5개 메달을 더 땄다. 장기간에 걸친 투자와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 덕이었다.

훈련 환경도 한국과 차이가 있다. 최가온은 여름만 되면 훈련이 가능한 일본을 자주 찾는다. 눈이 없는 계절에도 점프와 회전 등 공중 동작을 연습할 수 있는 에어매트 시설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고난도 기술이 핵심인 종목에서 비시즌 훈련 환경은 역량을 좌우한다. 일본에는 이런 시설이 10곳 이상 운영되고 있지만, 국내는 아직 전무하다. 설상에서의 성과를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경기력만큼이나 훈련 인프라 확충이 병행돼야 한다.

설상의 성과가 일회성 반짝임에 그칠지, 지속 가능한 경쟁력으로 이어질지는 결국 앞으로의 시스템에 달려 있다. 다만 이번 올림픽을 통해 한국 동계가 더 이상 빙상 하나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남은 과제는 이 변화를 구조화해 꾸준한 성과로 연결하는 일이다. 한국이 ‘빙상 강국’을 넘어 진정한 동계 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길 기대한다.
김영건 기자
dudrjs@kukinews.com
김영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