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년 전, 3·1운동 주역들은 왜 탑골공원으로 모였나

107년 전, 3·1운동 주역들은 왜 탑골공원으로 모였나

고종 국장 인파, 일제 감시망…그 가운데 찾은 최적의 공간

기사승인 2026-03-01 06:00:11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3.1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제107주년 3·1절을 이틀 앞둔 2월27일 오후, 서울 종로 탑골공원은 평온했다. 팔각정 아래에서는 젊은이들이 도시락을 나눴고, 어르신들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107년 전 이곳을 가득 메웠던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질문은 남는다. 1919년 3월1일, 젊은 학생들과 독립운동 주역들은 왜 서울의 수많은 장소 가운데 탑골공원을 택했을까.

“일제 감시망 피해 ‘경성의 심장’에서 외침”

당시 서울 도심에는 사람들이 몰릴 만한 장소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이틀 뒤로 다가온 고종의 국장(國葬, 3월 3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경성으로 인파가 모여들었고, 광화문과 대한문 일대는 특히 붐볐다. 그러나 길 위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곳은 일본 당국의 감시와 통제가 집중된 공간이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당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곳이 종로였다”며 “학생들도 인근 학교에서 모이기 쉬웠고, 자연스럽게 군중이 형성될 수 있는 장소가 탑골공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종 국장을 계기로 광화문 쪽에도 인파가 몰렸지만, 선언식을 치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팔각정. 1919년 3월1일 학생 대표가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 시위가 종로 일대로 확산됐다. 황인성 기자  

1899년 원각사 터에 조성된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었다.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고, 종로 중심지에 자리해 접근성이 뛰어났다. 특정 종교시설이 아닌 공공 공간이라는 점도 중요했다. 3·1운동을 준비한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색채를 넘어선 ‘민족 전체의 선언’을 지향했다. 공간의 성격은 선언의 성격과 맞닿아 있었다.

공원 중앙의 팔각정은 군중을 결집시키는 중심점이 됐다. 학생 대표가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모여 있던 군중은 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는 종로 일대로 빠르게 확산됐다. 탑골공원은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발신하고, 집단의 의지를 세상에 선언한 장소였다.

3·1운동은 이후 약 3개월간 전국 1500여회 이상 시위로 번졌고, 약 20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수천명이 희생됐고, 수만명이 체포됐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헌법 전문에 명시된 국가 정통성의 출발점이 됐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내 설치된 독립선언서 안내판. 1919년 3월1일 이곳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황인성 기자 

독립운동 상징 공간의 부침…‘특정 세대 전유’ 넘어 변화 타이밍

세월이 흐르며 탑골공원의 위상은 부침을 겪었다. 한때 고령층만의 전유물로 고착화되면서 무질서와 악취, 세대 간 단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종로구청이 금주 구역 지정과 바둑·장기 정비 등 질서 확립에 나서면서 공원의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27일 현장에서 본 탑골공원은 더 이상 노인들만의 전유 공간이 아니었다. 팔각정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청년들과 어르신들의 평온한 시선이 어우러져 107년 전 이 공간이 가졌던 ‘세대 불문 연대’의 가능성을 남겼다.

3·1독립운동과 관련된 유적지인 서울 종로구 승동교회 전경. 학생 대표들이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한 장소로 전해진다. 황인성 기자 

“기억을 잇는 프로그램 필요”…유적지 투어 활성화 제언

다만 탑골공원이 3·1운동의 살아있는 상징 공간으로 기능하기엔 여전히 과제가 남는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탑골공원은 한국인에게 매우 상징적인 장소임에도 정부나 서울시 단위의 대규모 행사는 드물다”며 “3·1절뿐 아니라 상시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프로그램이 이곳에서 열려 시민들이 장소의 무게를 체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서울 시내 유적지를 잇는 투어 프로그램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보성사 터와 승동교회, 태화관 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 3·1운동 관련 장소는 도보 동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체계적으로 안내하는 공공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기억의 공간이 일상의 공간 속에 흩어져 있는 셈이다. 또한 보성사 터 등 일부 유적지는 노숙자 관리 부실 등으로 인해 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기에 어색한 모습이었다.

107년 전의 함성을 오늘날 ‘역사 투어’와 ‘세대 간 대화’ 같은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갈 때 탑골공원은 박제된 기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
황인성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추천해요
    0
  • 슬퍼요
    슬퍼요
    0
  • 화나요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