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바이오산업의 연구개발(R&D) 축이 암이나 희귀질환 등 ‘미충족 의료 수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임상시험 설계 전략이 중요해지고 있다. 임상시험계획을 어떻게 수립하고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신약 개발 성공 여부가 갈리는 만큼, 임상시험수탁기관(CRO)의 역할이 확대될 전망이다.
5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신약 개발 시장은 고위험·고부가가치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며 질적 경쟁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동안 화학 합성 기반의 저분자 화합물이 의약품 시장을 주도해 왔으나, 바이오의약품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등장하면서 단일클론항체, 항체약물접합체(ADC), 이중항체, CAR-T(키메라 항원 수용체 T세포·카티), 유전자 치료제 등 다양한 모달리티의 치료제가 차세대 파이프라인으로 개발되고 있다.
국내의 경우 지난 2010년대부터 신약 개발이 본격화된 이후 여러 국산 신약이 허가됐지만, 제네릭(복제약) 중심의 내수시장 경쟁 구조가 오래 지속되며 혁신 신약의 경쟁력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임상 환경 변화 속에 CRO는 단순히 임상의 일부 영역 업무를 대행하는 지원 조직을 넘어 제약·바이오 기업과 함께 전략을 설계하는 파트너로 부상했다. 특히 후기 임상(3상)은 신약 개발 성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단계지만, 수천억원 단위의 자금이 필요한 고비용 구간으로 꼽힌다. 실패 시 손실 규모가 크고, 통계적 설계 오류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글로벌 통계 분석에 따르면 신약 후보물질이 임상 1상부터 최종 허가까지 도달할 확률은 약 10% 내외에 불과하다.
국내 CRO 산업은 최근 수년간 빠른 양적 성장을 이뤘지만, 여전히 임상 운영 중심 구조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한계로 지목된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의 ‘2025년 임상시험 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국내 CRO 시장 규모는 약 9835억원으로 전년 대비 20% 이상 성장했다. 그러나 서비스별 비중을 살펴보면 ‘임상개발 컨설팅’은 3.2%에 그쳤다. 프로젝트 관리(18.3%), 기관 관리(17.4%), 자료 관리(13.4%), 통계 분석(12.1%) 등 운영 중심 서비스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기반의 데이터 분석 및 환자 스크리닝 기술을 접목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CRO가 단순한 ‘수탁자’가 아닌 신약의 성공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설계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평가다. 실제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 의약품청(EMA) 등 주요 규제기관의 심사 기준이 고도화됨에 따라 단순히 데이터를 제출하는 수준을 넘어 규제기관의 의도를 정확히 해석하고, 요구사항을 선제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경험 기반의 전략 수립 능력이 CRO에 요구되고 있다.
1세대 CRO 전문가로 꼽히는 이영작 LSK글로벌PS(LSK Global PS) 대표는 “과거 신약 개발이 주로 화학합성 의약품에 국한됐다면 최근엔 표적치료제, 항체치료제, ADC, 세포치료제 등으로 영역이 크게 확장되며 유형이 다양해지고, 제약 시장 역시 다변화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의약품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검증하기 위한 임상시험 역시 그에 맞춰 보다 다각적이고 정교한 접근이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LSK글로벌PS는 임상 설계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해 조직과 서비스 체계를 설계 중심으로 정비해 왔다. 지난해 12월 CRO 최초로 ‘지식 기반 비즈니스(Knowledge-to-Business, K2B)’ 모델을 공식화하고 임상 운영 중심의 전통적 CRO 역할을 넘어 초기 개발 전략 단계부터 전주기에 관여하는 자문 체계를 강화했다.
핵심 축은 ‘CSD(Clinical Science & Development)’ 조직이다. CSD는 연구전략(RS), 임상전략(CS), 학술연구서비스(ARS)로 구성되며, 신약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과학적 가설 설정, 평가변수 정의, 통계 설계, IND(임상시험계획서)·IDE(확증임상) 문서 전략 수립, 외부 대조군 활용 등 주요 설계 요소를 통합 지원한다. 또 추정 대상 체계 기반 통계 전략과 CDISC(Clinical Data Interchange Standards Consortium) 데이터 표준 역량을 강화해 글로벌 허가 심사에서 요구되는 데이터 정합성과 추적 가능성 확보에 대응하고 있다.
이 대표는 “임상 3상 단계에서의 실패는 단순한 비용 손실을 넘어 기업의 개발 전략을 재조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초기 전략 수립 단계부터 통계학적 관점을 충분히 반영해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임상적 접근을 취할 것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회사는 이런 추세에 발맞춰 통계부서를 통계과학본부로 재편해 과학 기능을 강화하고, CSD 부문을 확대 개편해 변화하는 신약 개발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