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112)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112)

사전트의 <용연향 연기, 앰버그리스의 연기>는 최음제였다! 

기사승인 2026-03-16 09:55:01
 
존 싱어 사전트, 용연향 연기, 앰버그리스 연기(Smoke of Ambergris), 1880, 캔버스에 유채, 139.1 x 90.6cm, 메사추세츠주 월리엄스타운, 클락 아트 인슈티튜트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가 모로코에서 그린 그림은 파리 관람객을 매혹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는 탕헤르의 집을 빌려 모델을 세우고, 모로코 이슬람식 건축의 대리석 기둥과 하얀 벽을 배경으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최종 완성은 파리에서였다.

서구인의 눈에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장면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북아프리카 여러 지역의 의상과 풍경을 절묘하게 혼합한 연출이었다.

모로코는 내게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마라케시의 제마엘프나 광장은 뱀을 다루는 상인, 헤나로 팔을 물들이는 여인, 물장수들이 어우러져 살아 있는 무대처럼 펼쳐지고, 미로처럼 복잡한 페스의 메디나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과 중세부터 이어온 전통 염색장이 자리한다.

모로코의 세계문화유산인 페스 메디나의 수하라(Chouara) 염색장

지금도 명품 회사에 가죽을 납품하는 수하라 염색장은 소 오줌과 새똥으로 무두질하는 냄새를 막기 위해 상인들이 박하를 건넨다. 인디고, 샤프란, 양귀비, 헤나로 물든 염료통은 마치 팔레트처럼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벌거벗은 몸으로 하루 종일 가죽을 손질하는 남자들에겐 고된 삶의 현장일 뿐이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눈부신 색채가 공존하는 이 장면은 모로코가 지닌 이중적 매혹을 잘 보여준다.

탕헤르 출신의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9)는 21살에 길을 떠나 3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10만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그의 여행기는 술탄의 명으로 페스에서 구술되었고, 오늘날 문화인류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쇠락한 유럽식 호텔, 활기찬 시장의 소음, 사하라의 흙먼지, 지브롤터 해협의 강풍과 관광객의 버스 밑에 매달려 유럽으로 밀입국하려는 이를 단속하는 삼엄한 풍경까지—모로코는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사전트가 그린 니캅(Niqab)을 쓴 여인은 모로코가 품은 다층적 기억과 상징을 담은 존재였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용연향 연기를 들이마시는 모습은 서양인의 시선에 ‘이국적 환상’으로 비쳤지만, 그 배경에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다. 결국 그의 그림은 여행자의 시선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교차한, 모로코라는 무대 위의 환타지이다.
 
<용연향 연기, 앰버그리스 연기> 부분

1880년 살롱에서 사전트의 그림은 파리 관람객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북아프리카 여인의 뚜렷한 이목구비, 짙은 화장과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 화려한 반지를 낀 손끝은 이미 서구인들에게 낯선 매혹이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장식된 옷자락을 타오르는 용연향 연기에 가까이하며, 니캅을 파라솔처럼 펼쳐 향을 모으고 있었다. 니캅을 풀어헤친 순간,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은 ‘엑스터시’ 그 자체였다.

사전트는 “내 그림은 모두 색채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사실 그의 작품은 색채와 빛, 그리고 문화적 상징을 교차시킨 시각적 서사였다. 이국적 소재와 강렬한 색채는 당시 파리 미술계가 열광하던 오리엔탈리즘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사전트는 그 흐름 속에서 독창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용연향 연기, 앰버그리스 연기> 부분 

향유고래가 뿜어낸 귀한 물질, 용연향은 달콤한 향기를 내며 악령을 쫓는다고 믿어져 종교 의식이나 최음제로 쓰이며, 샤넬의 No. 5에도 들어간다. 은빛 향로에서 반짝이는 불꽃과 피어오르는 향은 보는 이의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사전트는 이를 단순히 장식적 요소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광택이 나는 금속 향로의 질감, 러그의 화려한 패턴, 바닥 타일의 세밀한 배열까지 치밀하게 묘사했다.

이 정교한 디테일은 흰색 배경에서 흰색 의상을 입은 여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색채와 질감의 대비 속에서 인물은 신비로운 중심으로 부각되었고, 관람객들은 이국적 환상과 예술적 세련미가 결합된 장면에 매혹되었다.  

존 싱어 사전트, 용연향 연기, 앰버그리스 연기, 1880, 종이에 수채화, 31.1 x 19.7cm, 이사벨라 가드너 미술관,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 걸린 사전트의 작품은 그의 초기 유화의 복제본으로, 친구이자 주요 후원자였던 사무엘 장 포치(Samuel Jaen Pozzi, 1846~1918)에게 헌정되었다. 포치가 세상을 떠난 뒤 경매에 출품되었고, 1919년 가드너가 필라델피아의 미술상 다니엘 H. 파르로부터 “모레스크(Moresque, 무어풍)”이란 제목으로 1,950달러에 구입했다.

이는 단순히 미술품 거래의 기록을 넘어, 사전트의 지적, 예술적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사례다. 포치는 당대 파리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고, 사전트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며 그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드너가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과정은, 사교적 인연과 예술적 후원이 어떻게 미술사의 흐름을 형성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존 싱어 사전트, 집에 있는 닥터 포치, 1881, 캔버스에 유채, 201.6×102.2cm, 해머 미술관, 로스엔젤레스

사전트의 첫 남성 대형 초상화인 포치의 초상은 2미터가 넘는 크기와 강렬한 붉은색으로 전시장의 어떤 작품보다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한다.

포치는 저명한 외과의사이자 산부인과 학회를 조직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미학자, 컬렉터,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사전트는 헨리 제임스(Henry James)에게 그를 “매우 뛰어난 존재”라 묘사했을 정도로 매료되었고, 초상화 속에서 포치를 비공식적이면서도 대담하게 표현했다.

화려한 벨벳 커튼과 비비드한 가운, 허리에 달린 술 장식, 수놓은 실내화까지 붉게 물든 장면은 마치 환자의 피를 상징하는 듯하며, 동시에 왕족이나 성직자의 의식복을 연상시킨다. 사전트는 남성을 정장 차림으로 묘사하던 전통 초상화의 관습을 깨고, 공공과 개인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새로운 감각을 선보였다.

35세의 포치는 검은 수염과 잘생긴 얼굴, 흰색 러프 칼라와 커프스로 장식된 우아한 손을 통해 관능적이고도 불안한 기운을 풍긴다. 섬세하게 묘사된 손은 그의 외과적 전문성을 강조하면서도 손의 얼룩과 촉촉한 시선은 신경쇠약의 암시처럼 읽힌다. 맨 부커상, 메디치상 등을 받은 줄리안 반즈(Julian Barnes)는 이 그림을 보고 <붉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집필했을 만큼, 손과 붉은 코트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서 이 책이 번역되거나 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랄 뿐이다.

포치는 뛰어난 의사이자 사교계의 바람둥이로, 배우 사라 베르나르와의 관계, 마르셀 프루스트와의 교류, 귀족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와의 인맥 등으로도 유명했다. 드레퓌스 사건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했으며, 결국 원한을 품은 환자에게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이 초상화가 소장된 해머 미술관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아르망 해머가 세운 곳으로, 그의 증손자 아미 해머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배우이다. 

존 싱어 사전트, 페르시안 거지 소녀, 1880년경, 캔버스에 유채, 테라 재단, 시카고, 다니엘 J. 테라 컬렉션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은 사전트의 작품 세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거의 단색에 가까운 창백한 장식 연구는 모로코에서 제작된 대표작 <앰버그리스의 연기>를 연상시키며, 그의 초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성한 직물의 대담한 브라브라(bravura) 화풍과 연결된다. 사전트는 이 스케치를 통해 빈곤을 낭만화하고, 인물을 스튜디오 연습용 “유형”으로 변환시켰다. 

또한 이 그림은 사전트가 속했던 파리 화가 모임의 교류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핀란드 화가 알버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의 비문은 이 작품이 선물이었음을 보여주며, 예술가들 사이의 우정과 상호 영향이 그의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드러낸다. 

<페르시안 거지 소녀> 부분
 
브라브라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프란스 할스가 밑그림 없이 직접 캔버스에 물감을 올리며 발전시킨 방식이다. 빠르고 거친 붓터치가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며, 숙련된 직관과 대담함을 갖춘 실력 있는 화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이다.

마네, 휘슬러, 사전트 역시 할스의 작품에 매료되어 하를렘까지 찾아가 그의 대표작 <노인 양로원의 여이사들>을 모사했고 반 고흐 역시 그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이다. 이 경험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사전트의 경우 초상화 속 직물과 질감을 대담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사전트가 남긴 그림들은 오리엔탈리즘의 환상과 서구적 욕망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긴장을 드러내는 예술적 기록이다. 바로 그 점에서 사전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관람객을 매혹시키며, 예술이 어떻게 시대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