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연극 ‘커튼콜의 유령’을 봤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그것도 집 앞이나 다름없는 고양 아람누리의 작은 가변형극장 ‘새라새’에서다. 끝나고 근처에서 역시 오랜만에 외식도 했다. 길지 않은 이동 시간이었지만 사실 각자의 일로 바쁜 아이들과 부부가 같이 서울로 나가야 하는 환경이라면 이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엔 별로 기대하지 않은 연극이었다. 그저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를 망치지 않을 정도면 되지 싶었다. 연말이고, 뭔가 들 뜬 분위기라도 내기 위해 웬만한 뮤지컬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대형 볼거리를 찾았으나 가까운 곳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대안으로 탐색하고 고른 것이 이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연극계에서 알아주는 ‘혜화동 1번지’ 출신의 연출가 작품이라서 그런지 시작하자마자 바로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본도 탄탄 했고 배우들의 연기도 연습을 많이 한 티가 났다. 300석의 극장 안은 관객이 3분의 1도 안되어 썰렁하고 추웠으나 공연을 잘 보고 나니 2만원이란 싼 가격에 이만한 연극을, 더구나 집 앞에서 잘 골랐구나 하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공연도 작품이 좋으면 모든 게 용서 되는가 보다.
작가는 연극을 인생에 빗대어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인생이란 분홍신을 신고 쉬지 않고 춤추기’라든가, ‘자기 자신이기보다 남의 분신으로 사는 데 불과한 것’이라는 암시 등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대사도 몇 번 반복 된다. 무얼 봐도 꼭 ‘소재’니 ‘주제‘를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세대로서는 이만한 소득이 없다.
문제는 식사를 하면서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느낀 감상을 가족, 특히 아이들과 나누고는 싶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어렵게 몇 마디 시작하기는 했으나 누구도 선뜻 반응이 없었다. 무슨 반응이든 보여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잘 못 말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 마침 나와 준 음식이 어색한 장면을 커버해 주었다. 아, 짐작컨대 우리네 가족의 공연 관람 후 모습이 바로 이게 아닌가 싶다.
딸아이가 중학교 때였나. 남자 백조들이 춤추는 매튜본의 ‘백조의 호수’를 보고 집에 오는 차안에서 대판 싸웠던 일이 ‘데쟈뷰’처럼 생각났다. 그때 나는 내가 본 느낌을 딸아이와 오순도순 이야기 하고 싶어 했는데, 딸아이는 아빠를 졸라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얻어 내는 데만 올인 했으니 싸움밖에 더 일어났겠는가.
지난번 도쿄에 갔을 때 둘러 본 극장 이야기를 했지만, 일본에 갈 때마다 부럽게 느끼는 것이 있다. 극장에도 미술관에도 관객이 줄을 지어 길게 서 있는 것이 그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일본인들의 취미 문화에서 찾았는데 일리가 있는 발견이라 생각한다. 일단 취미를 가지면 거기에 빠지는 그들이기에 우리에겐 지루하기만한 대여섯 시간짜리 가부끼나 노(能)에도 꼼짝 않고 몰입한다. 끝나고 나서도 서로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쉬지 않고 감상을 나누는 것도 그네들의 문화다.
예전에는 학교건 직장에서건 자기소개 양식에 늘 취미와 특기를 적는 칸이 있었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일본의 영향이었을까. 어쨌든 자기 취미를 갖는, 그래서 무엇인가를 깊이 파고들고 그것을 화제로 삼는 문화는 배울만하다. 인생을 재미
있고 의미 있게 사는 일이기도 할 터. 특히 공연이란 것은 혼자만 있는 데서 하는 취미라기보다 사람 많은 극장으로 나와 관객이 되어 집단적으로 체험하는 일이니, 갈수록 그런 사회적 관계를 가질 기회가 줄어드는 현대인들에게는 공연예술만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취미 활동이 또 있을까 싶다.
이용관(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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