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예지를 생각하고 본 영화 ‘암전’(감독 김진원)에 서예지는 없었다. 영화에 미친 공포영화 신인 감독 미정(서예지)이 등장해 광기를 띠며 기이한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었다. OCN ‘구해줘’에 이어 다시 장르물에 도전했지만 전작의 모습을 떠올리긴 힘들었다. 그만큼 미정으로 완벽히 변신했고, 홀로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나갔다. 거침없는 미정의 전진에 관객들은 발길을 맞출 뿐이었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서예지는 밝게 웃으며 미정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특한 회색 머리와 뿔테 안경, 볼에 주근깨까지 모두 감독이 주문한 설정이었다. 김진원 감독이 그린 미정이 곧 김 감독을 의미하는 만큼 많이 관찰하면서 연기를 준비했다.
“미정이의 외모 설정은 모두 감독님의 의견이었어요. 전 예쁘게 나왔으면 했죠. 하지만 미정은 옷도 안 갈아입는 캐릭터예요. 저희 감독님도 똑같은 옷을 다섯 벌씩 사서 입는 분이시거든요. 전에 염색을 한 번도 안 해봐서 전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회색 머리를 위해 탈색을 열 번이나 했어요. 메이크업도 아예 안 했어요.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주근깨가 안 그려진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얼굴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상관없었어요.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죠. 보통은 감독님들이 배우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데 이번엔 반대로 제가 감독님께 궁금한 게 정말 많았어요. 미정이가 곧 감독님을 그린 거니까 감독님을 보고 연기해야 했거든요.”
서예지는 ‘암전’에서 사실상 1인 2역을 했다. 등장하는 귀신 목소리도 직접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서예지는 처음엔 목소리 연기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암전’을 마치고 다른 작품을 촬영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안부 문자를 보내셨어요. 연락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셔서 부탁하실 거 있냐고 물었더니 ‘귀신 목소리를 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하셨죠. 그건 제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 ‘안 돼요’라고 보냈어요. 귀신 역할을 연기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더 좋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이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 왜 제가 해야 하는지 한 번 더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미정이가 귀신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답하셨고, 그 말이 와닿아서 하게 됐어요. 다 끝냈는데 또 고생을 하게 된 거죠. 목도 조르고 ‘끽끽’하는 소리도 내고 다양한 목소리를 녹음했어요. 그중 몇 개를 뽑아서 영화에 쓰시더라고요. 기계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배우들이 스스로 모든 걸 하는 점이 ‘암전’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서예지는 ‘암전’의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자신이 고생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을 정도로 힘든 촬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치고 고생을 해도 영화가 잘 나오면 만족한다고 했다.
“전 몰입할 때 최선을 다하는 걸 중요시해요. 열정이 과하다고 할까요. 끝까지 가는 스타일인 거죠. 제 몸이 다쳐도 그 아픔만큼 영화가 잘 나오면 정말 만족해요. 배우가 되고 나선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 직업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죠. 눈뜨면 해야 하는 게 연기니까요. 연기자로 살면서 평범한 서예지를 잃어버렸어요. 이젠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게 습관화가 된 거죠.”
서예지는 ‘암전’을 찍으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했다. 이렇게 염색을 한 것도, 소리를 지른 것도 처음하는 경험이었다. 관객들이 서예지가 아닌 ‘미정’으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제 작품을 보면 흥행 여부를 떠나서 후회하는 작품도, 정말 좋았던 작품도 있어요. 하지만 저에겐 제가 최선을 다했을 때가 베스트예요. 지금까지 30년을 살면서 ‘암전’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굴러본 적이 처음이었어요.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액션과 제스처, 감정에 도전해봤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시면서 배우 서예지보다는 ‘암전’의 미정이라는 캐릭터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킹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