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1909년 러시아 연해주. 자작나무 아래 선 도마 안중근이 결연하게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른다. 독립군 참모중장인 그는 일본군 포로를 풀어줬다가 역습당해 크게 패한 참이다. 곁에는 11명의 동지들. “우리의 함성이 잠자는 숲을 깨우듯 어두운 이 세상 깨우리”라고 합창한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네 번째 손가락을 함께 자른 단지(斷指)동맹으로 시작한다.
‘영웅’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당한 안중근의 마지막 1년을 그린다. 2009년 초연한 한국 창작 뮤지컬로 지난달 21일부터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아홉 시즌째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영웅’ 대표 배우로 불리는 정성화·양준모와 새로운 영웅 민우혁이 안중근을 연기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김도형·서영주·최민철이 나눠 맡았다. 작품은 역사에 기록된 안 의사 이야기를 토대로 궁녀 설희, 중국인 남매 왕웨이와 링링 등 가상 인물을 더해 독립을 향한 투사들의 열망을 뜨겁게 되살린다.
양준모가 연기하는 안중근, 일명 ‘양중근’은 고독한 맹수 같다. 뮤지컬을 각색한 영화 ‘영웅’(감독 윤제균) 속 부드럽고 온화한 안중근(정성화)과는 다른 매력이다.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두 눈과 낮고 힘 있는 음성, 무엇보다 터질 듯한 에너지로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안 의사 유묵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가 부르는 이 뮤지컬 대표곡 ‘누가 죄인인가’는 탄성이 절로 난다. “누가 죄인인가”라고 묻는 마지막 소절은 호통처럼 권위 있고 천둥처럼 강력하다.
뮤지컬에선 안중근의 고뇌가 두드러진다. 그가 싸워야 할 상대는 일본 제국주의뿐만이 아니다. 그는 시시때때로 고개를 드는 두려움과도 끊임없이 싸운다. 벗의 장례를 치른 날, 안중근은 울부짖는다. “조국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죽은 동지들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가혹한 운명. 그는 “내 앞에 놓인 선택 하나하나가 두렵기만 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영웅은 무너지지 않는다. 안중근이 고뇌 속에서 부르는 ‘영웅’은 뮤지컬 전체를 축약한 듯 극적이다. 연약한 목소리로 시작한 노래가 “다시 걸어가리라”는 다짐을 거쳐 뜨거운 기도로 맺을 때, 무대 위 안중근은 태산처럼 크고 높아 보인다. 쫓고 쫓기는 일본 경찰과 독립투사를 앙상블 배우들의 군무로 재현한 장면과 영상과 실물 모형을 활용한 하얼빈행 기차 장면 등도 볼거리다.
애국심이 흥행을 보증하던 시절은 지났다. 조국이라는 단어가 주는 뜨거움도 예전만 못하다. 그런데도 ‘영웅’의 설득력이 여전한 건 배우들의 에너지와 진정성 덕분이다. “뜨거운 조국애와 간절함을 담아 저 안중근, 그리고 우리. 이 한 손가락 조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뮤지컬을 여는 이 대사 속 ‘그리고 우리’는 양준모가 낸 아이디어로 생겨났다. 그는 이름 없이 그늘에서 죽어간 독립투사를 기억하고자 ‘우리’를 덧붙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커튼콜이 끝나는 순간까지 접혀있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도 관객들을 뭉클하게 만든다. 공연은 다음 달 28일까지.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