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거주 지역인 요덴브레이 거리에 있는 이 집은 렘브란트가 1639년부터 살았던 집이다. 1911년 이후로 렘브란트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렘브란트는 일찍이 그의 작품성을 인정받아 고가의 초상화 주문이 밀려왔다. 그리고 레이덴 시절부터 제자들이 몰려와 한 명 당 일 년 동안 100 길더씩 받았으니, 연간 소득이 3천 길더 이상이었고, 그의 재산은 4만 길더 이상이었다.
당대 네덜란드의 평균주택 가격이 1,200 길더였다. 이 집은 13,000 길더로 33살의 렘브란트가 이 집을 구입할 때. 평균가의 10배가 넘는 저택이었다. 렘브란트는 당연히 이 집을 구입하며 융자를 받았고 잘 나가는 스타작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이 끝나 겨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4년 뒤 영국과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 전함들은 네덜란드 상선을 이유 없이 억류하고 발포하였다.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통해 무역품을 거래하며 살아가던 네덜란드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나라가 급격히 어려워지고 중산층이 무너졌다. 렘브란트에게도 빚쟁이들이 찾아오며 살림이 기울기 시작했다. 대출금도 남아 있었고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8,000 길더의 빚을 갚지 못한 렘브란트는 집을 팔거나 대책을 세우지 않고 마냥 천하태평이었다.
1657년에 파산선고가 내려졌다. 그림 그리는 재능만 있다면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고 저축이라곤 모르던 렘브란트의 낭비벽과 잘못된 투자가 파산을 불러왔다.
경매에 붙여진 파산선고 목록에는 얀 반 에이크, 라파엘로, 조르조네를 비롯하여 루카스 크라나흐, 브뤼헬, 루벤스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판화와 서책, 기묘한 사슴뿔과 노루 뿔, 미늘창 스무 자루, 아라비아 반월형 환도, 인도산 부채, 로마 황제들의 흉상 조각, 오리엔트 민속의상 등이었다.
렘브란트는 이런 물건들을 그림 그릴 때 모두 사용하여 정확성을 추구했다.
1658년에는 이 집이 팔렸다. 가구와 가재도구, 식기류까지 모조리 판매되었지만 렘브란트의 손에 들어온 것은 동전 한 닢도 없었다.
델프트의 화가 페르메이르도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팔리지 않는 그림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쏘다니다 심장발작으로 43살의 나이로 급사하여 파산 선고를 받았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제해권을 빼앗기며 끝이 났다.
렘브란트는 1650년부터 경제적 곤란을 겪은 뒤, 로젠그라호트(Rozengracht)에 있는 임대 주택으로 이사했다. 암스테르담의 유력인사들은 더 이상 그림 주문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 중 직물 길드는 그에게 집단초상화를 의뢰했다.
렘브란트의 예술 세계는 점차 독자적으로 흘러갔다는 반증이 ‘암스테르담 직물 길드의 이사들’이다.
그는 매우 세련되게 이 마지막 집단초상화를 그렸다. 이사들은 이 작품을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모자를 쓴 직물 길드의 이사들은 똑같이 염색된 옷을 입고, 염색된 천의 품질을 검사하고 있다.
임기가 1년인 이사들은 길드에 납품된 천의 품질을 매주 세 차례 검사하였다. 이들은 합격품에 금속 인장인 실(seal)을 달아 표시했다. 직물의 한쪽 귀퉁이에 가죽을 대고 앞면에는 도시의 인장을, 뒷면에는 자신의 길드 인장을 새긴 동전 만한 납을 달았다.
납의 두께가 가장 두꺼우면 최고 등급으로, 각 등급마다 납을 추가하여 품질 등급은 네 가지였다.
그들 뒤에 모자를 쓰지 않고 서 있는 남자는 모임이 열리는 건물의 관리인이다. 렘브란트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기법이지만, 빛과 구도 그리고 색의 배치는 매우 전통적이다. 렘브란트는 여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관람자를 흡인력 있게 끌어당기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직물 길드의 홀에 걸려 있는 다수의 집단초상화에서 이사인 검사관들은 모두 앉게 하고, 관리인은 서 있는 구도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한 사람만 서 있는 구도에서 변화를 주었다.
렘브란트는 우리의 도착으로 방해받은 듯 검사관들이 업무를 중단한 채 올려다보는 순간을 생동감 넘치는 장면으로 연출했다.
빨간 페르시아산 다마스쿠스 비단으로 덮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검은색 옷을 입은 대표들의 엄숙한 분위기를 완화시킨다.
가운데에는 견본의 품질 규정집이 놓여 있다. 렘브란트는 다른 집단초상화에 비해 빛을 유난히 밝고 환하게 처리해 부드러운 기운마저 맴돈다. 이것이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인기 있는 이유였다.
특히 왼쪽의 빌렘 반 도이엔부르크를 살펴보면, 왼쪽 창에서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대낮의 햇살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생기지만, 눈 아래 광대뼈 부분은 역삼각형으로 밝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바로 ‘렘브란트 라이팅(Lighting)’이다.
이 그림은 관람객들의 시선보다 약간 높은 위쪽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17세기 전통적인 집단 초상화 구도와 뚜렷이 구분된다. 한 남자가 책을 테이블에 받치고 기대어 일어서는 장면이 흥미로운 해석을 낳았다.
즉, 상인 대표들이 주주들과 공개 이사회 중 회원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일어서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상인대표들은 주주들과 모임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쪽에 앉아 있는 사람의 구도는 그림을 걸기 위한 벽의 위치를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실 암스테르담 직물 길드가 의뢰한 이 초상화는 1771년까지 길드 홀 벽에 걸려 있었다.
일어선 상인이 몸을 기울이며 정면으로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세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딴생각을 하다가 황급히 일어서는 중일까? 이 자세는 렘브란트가 수정을 거듭했다. 다른 네 남자도 시선을 집중하며 누군가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책을 짚으며 일어서는 남자가 길드 대표로 선임되는 듯하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조합을 이끌어갈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신중한 인물들이라는 믿음을 준다. 이는 렘브란트의 탁월함이다.
렘브란트는 이사들의 나이와 외모 그리고 성격을 각각 드러냈다.
또한 안정된 자세를 취하면서도 17세기 초상화 기법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석 장의 데생과 X선 촬영으로 보건대,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며 고심한 결과였다.
렘브란트는 무엇보다 대표들의 공정함과 일관된 자세를 나타내려 노력했다.
‘암스테르담 직물 길드의 이사들’은 렘브란트 말년의 집단초상화 중 대표작이다.
이 초상화 기법이 상당히 성공을 했고 인기도 있어 말년 10년의 초상화 대부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대다수 동료나 제자들이 그렸으며, 겨우 10여 점 남짓만 렘브란트가 직접 그렸다. 이는 ‘톨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을 그린 지 30년 후에 그려졌다.
세상을 보는 편협한 방식에서 벗어난 네덜란드, 그중에서도 특히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다.
세계의 문물이 오가며 네덜란드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여건이 고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고 자원이 없는 그들은 세계 속에서 부를 창출해야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경우도 4개 국어를 배우고 37년 생애 동안 37번 이사를 했다.
바그너가 작사 작곡한 가극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신을 모독한 죄로 네덜란드 사람의 배가 희망봉 근처나 북해를 떠다닌다는 북유럽 전설을 소재로 하였다. 지구는 돈다. 특히 네덜란드인의 지구는 쉬지 않고 돈다.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고립된 조선에 찾아온 네덜란드인이 있었다. 하멜은 효종 4년(1653)에 제주도에서 표류된 경위와 14년간의 억류 생활에 대해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를 기록하였다.
하멜은 동인도회사 선원으로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일행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살다 귀국하였다.
특히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는 조선의 지리, 풍속, 군사, 교육, 교역 따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는 1668년에 네덜란드어로 발간되었다. 이런 이유로도 네덜란드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라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