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5)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5)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

기사승인 2024-07-08 10:01:29
1660년, 25살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는 화가로서의 시선을 일상적인 모습들과 친밀한 사적인 영역인 가정의 실내로 돌리면서 그만의 새로운 탐구를 시작하였다.

이런 시선의 전환은 1659~1661년경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이 관람객을 바라보는 듯한 <음악 교습을 받는 소녀>를 그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음악 교습을 받는 소녀, c. 1659~61, 캔버스에 오일, 39.4x44.5cm, 뉴욕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소녀의 시선이 처음에는 더 안쪽으로 향했지만, 페르메이르가 이후 관람자를 바라보도록 바꾸었다고 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와인잔을 든 소녀, c. 1659~1661, 캔버스에 오일, 77.5x66.7cm, 브라운슈바이크 헤르조그 안톤 울리히(Herog Anton Ulrich) 박물관

그는 1659~61년경에 그린 <와인잔을 든 소녀>에서 더 많은 변화를 주었다. 거기서 주인공은 완전히 고개를 돌려 활짝 웃는 미소로 관람자를 바라보며 우리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페르메이르는 주인공의 시선을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으로 연출하였다.

우선 관람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인물들에 대한 외향적인 묘사가 있다. 다른 한편은 관람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예를 들면 <와인 글라스>에서의 여성 주인공처럼 극도로 내성적인 인물의 설정이다. ​​

두 작품은 제목이 비슷하여 혼동을 주지만 여자 주인공의 시선은 서로 달라서 대비가 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와인 글라스, 1659~1661, 캔버스에 오일, 67.7x79.6cm, 베를린 국립박물관(왼쪽 파란 부분은 조명 반사)

이 두 가지 상황 설정은 1664년과 1667년 사이에 관람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소녀들의 클로즈업 이미지인 작은 트로니를 창작하도록 이끌었다. 트로니(Tronie)란 허구적인 의상을 입은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얼굴을 그린 환타지 초상화이다.

페르메이르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 <풀룻을 든 소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리고 <베일을 쓴 소녀> 등의 작품을 트로니로 그렸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빨간 모자를 쓴 소녀, c. 1664~67, 패널에 오일, 22.8x18cm,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앤드류 W. 멜론 컬렉션

실존 인물을 모델로 그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약간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 수 있다.

특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페르메이르의 하녀로서 실존 인물인 듯 묘사된 소설과 영화로 유명해진 작품이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추적하다 보면 추리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재미가 있다. 비록 네 작품이지만, 트로니는 처음부터 초상화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살아있는 모델들에 대한 연구에 기초했을 것이다.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4~67, 캔버스에 오일, 44.5x 39cm,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칭송을 듣는다.

마우리츠하위스를 찾는 방문객은 실제로 이 작품을 보기 위함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유화이다.

커다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파란 터번을 쓰고 누가 불러서 뒤돌아보는 듯하다. 고개를 뒤로 돌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이 살짝 벌어져 있다. 커다란 진주를 페르메이르는 한두 번의 터치로 완성했고, 진주의 아래 부분에는 흰 칼라도 비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부분

왼쪽에서 오는 빛을 받으며 맑은 눈망울은 영롱하게 반짝이고 우리를 따라다닌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한 듯 눈동자와 입가에 흰 점이 있는 촉촉한 입술은 투명함을 더해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부분

 이렇게 어둠과 빛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네덜란드 황금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 페르메이르도 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다.

즉, ‘북구의 모나리자’답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물론이고, 라파엘로의 <빈도 알도비티Bindo Altoviti>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빈도 알도비티>는 수백 년 동안 그려진 초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은행가의 초상으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라파엘로, 빈도 알토비티, 1515년, 패널 위에 오일, 출처: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이 작품의 주인공 젊은 피렌체 사람은 흐르는 듯한 긴 금발 머리를 가졌다. 젊은 빈도는 아직 구레나룻 수염이 자라지 않고, 풋풋한 장밋빛 입술과 뺨 그리고 청회색의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

왼쪽 위에서 들어온 빛은 그의 흰 매부리코를 살짝 비추고 눈에 음영을 드리운 채 우아한 목덜미를 지나 가슴에 올린 왼손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초록색 배경과 인물에 걸친 청색과 흑색 옷이 이루는 단순한 색채 대비는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에 초점을 두게 한다. 동작과 포즈 자체도 인상적이긴 하지만 색채 대비 역시 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몸은 오른쪽을 향하나 시선은 관람자에게 방해라도 받은 듯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다. 이성적인 은행가보다는 감성적인 화가나 시인이 더 어울리는 이미지다. 

또 다른 르네상스 화가인 티치아노도 라파엘로의 영향으로 역시 <남자의 초상>에서 이런 자세를 선보였다. 16세기 초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의 화가 티치아노를 모방하여 르네상스 스타일의 포즈를 시도했다. 이 포즈는 몸의 위치와 시선의 방향을 다르게 하여 흥미로운 긴장감을 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배경의 검은색은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얼굴과 극적인 대비로 실제 인 듯 트롱프뢰유(trompe-l’oeil)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페르메이르는 어둡고 균일한 배경에서 파란색과 담황색 터번이 밝고 어두운 음영으로 나타나게 하여 직물의 주름을 표현했다.

그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인디고(indigo), 백납(lead white) 등으로 블루 톤을 구현했다. 천연 황토에 백납을 섞어 만들어 터번의 노란색을 얻었다. 그리고 입술을 연지벌레로 만든 빨간 연지색(madder red)로 칠했다. 

또한 이 작품에서 소녀는 주름진 소매가 있는 현대적인 황토색에 녹색이 흐르는 재킷을 입었는데, 이는 1660년대 전반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플룻을 든 소녀>도 또한 당시 유행인 옷을 입었다. 토끼털로 트리밍 된 파란색 실내복은 <콘서트>와 <저울을 들고 있는 여자>에서 젊은 여성들이 입었던 멘틀과 같다.​​

페르메이르가 창작한 트로니에 나오는 의상은 환상과 아름다운 색채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이 토끼털 옷만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것이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플룻을 든 소녀, 1664~67, 패널에 오일, 22.8x18cm,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와이드너 컬렉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 c. 1662~1664,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우리는 특별한 색을 사용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플룻을 든 소녀 >에서 페르메이르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뚜렷한 것은 피부 색깔에 녹색의 흙을 바르고 얼굴에 살색의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이 색소는 16세기와 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아직 다른 네덜란드 화가의 작품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실험적인 트로니에서 그것을 사용해본 후, 페르메이르는 인물의 살색으로 후기 그림들 중 몇 개에 이 녹색 화법을 사용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소녀들은 그들의 표정과 포즈에 있어서 서로 유사성이 있지만 각각 독특한 특징도 보여준다. 그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일을 쓴 소녀>를 그렸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얼굴을 어깨 쪽으로 돌리며 관람자를 바라본다.

페르메이르가 1659~61년경 <음악 교습을 받는 소녀>에서 처음으로 적용한 혁신적 시도인데, 이는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낸다. 

​​페르메이르는 수업을 마치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여 <빨간 모자를 쓴 소녀>의 팔뚝과 그림 가장자리에 <베일을 쓴 소녀>의 팔뚝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플룻을 든 소녀>의 정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화가는 과감하고 혁신적으로 그녀의 몸에 약간 각도를 주고 있어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왼쪽 팔을 기대고 오른쪽 팔은 자유롭다. 반면, 페르메이르는 <베일을 쓴 소녀>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는 흉상으로 묘사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베일을 쓴 소녀, c. 1664~67, 캔버스에 오일, 44.5x 40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다른 두 그림에서 페르메이르는 평면적인 이미지로 소녀들의 위치를 세련되게 연출했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서 그는 19세기 화가인 에드가 드가가 즐겨 사용하던 스냅사진처럼 왼쪽 등과 팔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플룻을 든 소녀>에서는 왼쪽 소매를 살짝 잘라내어 우리 쪽으로 교묘하게 가까이 다가앉게 만들었다. 소녀의 모자 가장자리와 오른손 손가락 끝은 훨씬 더 과감하게 생략했다. 소녀 앞에는 테이블 상판이 살짝 보여 관람자의 공간과 연결되게 한다.​

페르메이르가 창작한 트로니들은 1660년대 중반 화가로서의 경험과 진화 그리고 창의성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구성과 실험 정신의 산물이었다. <계속>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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