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국회도 연금개혁 추진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3년 뒤 국민연금 보험료 수입만으론 급여 지출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데도 말이다. 여야가 연금개혁 논의에 시동조차 걸지 못하고 있자, 추진 의지에 대한 의구심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22일 국회 등에 따르면 여야는 개혁안을 어디에서 논의해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했다. 국민의힘은 여·야·정 협의체나 국회 상설 연금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요구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산하에 연금소위를 만들어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어디에 협의체를 두느냐에 따라, 개혁안 처리의 우선순위는 달라진다. 모수개혁부터 추진하자는 민주당과 달리, 국민의힘은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병행해 논의하길 원한다. 모수개혁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 숫자를 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구조개혁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각종 특수직역연금을 통합하는 등 제도 자체를 뜯어고치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개편 작업이 요구돼 논의에 많은 시일이 걸린다.
국민의힘 주장대로 여·야·정 협의체를 만들 경우, 다부처가 얽혀있는 사안인 구조개혁 논의를 병행할 수 있다. 퇴직연금은 고용노동부, 공무원연금은 인사혁신처 등 관할 부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당 요구대로 복지위 산하에 연금소위를 둘 경우, 복지부 관할인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에 관한 논의만 가능하다.
다만 협의체를 꾸리기 이전에 민주당은 정부가 구조개혁안부터 내놔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정부가 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한다며 지난 21대 국회에서 모수개혁안 통과를 지연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21대 국회에서 여야는 모수개혁안에 극적 합의를 이뤘다. 국회 연금특위에서 먼저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데 합의했다. 문제는 소득대체율이었다. 국민의힘은 43%, 민주당은 45%를 주장하며 2%p 차이로 개혁안 처리에 실패했다.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여당이 소득대체율 44% 절충안을 제시했고 민주당이 이를 전격 수용하며 합의안이 도출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막판에 ‘소득대체율 44%안’은 구조개혁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처리를 거부했다.
22대 국회에서도 이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22대 국회가 개원한지 약 2달째지만 여야가 책임을 서로에게 떠밀며 논의가 공회전하고 있다.
김남희 민주당 의원 등 17명 야당 소속 의원들로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에 적극 동의하는 국회의원 일동’은 2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여당은 개혁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며 “현실적인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와 여당이 8월까지 책임 있는 대안을 제출하라”고 촉구했다.
국민의힘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위원들도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당은 정부안을 기다리는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21대 말에 제시한 모수개혁 안 이외의 구조개혁에 대한 입장은 전혀 없는 것이냐”라며 “야당은 단순히 모수개혁으로 몇 년 연명하는 방안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연금을 만들기 위한 구조개혁 방안과 로드맵을 제시하라”고 했다.
정부 역시 연금개혁 추진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지난 16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연금 구조개혁안을 제출해 달라는 야당의 요청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구조개혁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복지위 위원장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지난 19일 “수차례 복지부에 ‘구조개혁안을 제출하라’, 심지어 ‘하나의 안이 정리가 안 되면 선택이 가능한 여러 가지 사안을 포함한 안도 좋으니 내달라’ 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다”며 “연금개혁을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라고 꼬집었다.
시민사회에서도 정치권의 개혁 의지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태환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제는 할 의지가 없고, 모두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구조개혁 이후엔 다른 핑계를 댈 것”이라며 “이러다가는 이번 개혁도 물 건너 간다”고 우려했다. 김진석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도 “연금개혁 논의가 좌절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연금개혁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의지, 책임감의 부재를 들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3년 뒤엔 국민연금 역사상 처음으로 연금 지급을 위해 기금을 헐게 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연구원의 ‘국민연금 중기재정 전망(2024~2028)’ 보고서를 보면 오는 2027년엔 연금 급여 지출이 보험료 수입보다 3조2536억원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해 들어온 보험료로는 지출할 연금 지급액을 맞출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보험료 수입만으로 연금 지출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면, 결국 다른 곳에서 돈을 끌어와야 한다. 현재 투자에 집중하고 있는 국민연금기금 운용 수익을 빼서 급여 지출액을 충당할 수밖에 없다. 당장 2027년부터 모자라는 3조원을 마련하려면 투자했던 주식이나 채권 등을 팔아 현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국민연금 기금이 2055년 소진된다고 해서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있는 건 아니다. 당장 2027년부터 국민연금은 순매수가 아닌 순매도 포지션이 돼 기금 운용 난이도가 높아진다”며 “하루빨리 연금개혁을 통해 상황을 개선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