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졸중, 치매, 편두통과 함께 4대 만성뇌질환으로 꼽히는 뇌전증은 최근 고령 인구 증가에 따라 발병 위험이 높아지고 있지만 일부 신약의 도입이 늦어져 치료 한계가 이어지고 있다. 뇌전증 환자가 신약을 이용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뇌전증학회는 10일 ‘세계 뇌전증의 날’을 기념해 삼성서울병원 중강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국내 뇌전증 치료 환경을 진단했다. 뇌전증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알리고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15년 국제뇌전증협회(IBE)와 국제뇌전증퇴치(ILAE)는 매년 2월 두 번째 월요일을 ‘세계 뇌전증의 날’로 제정했다. 올해 뇌전증학회의 슬로건은 ‘뇌전증 편견을 넘어서 함께하는 세상으로’이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의 전기적 방전으로 인해 경련, 의식 소실 등 다양한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만성질환이다. 뇌전증은 영아부터 고령의 성인까지 전 연령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후천적인 원인이 많다.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36만명으로 추정되며, 매년 10만명당 20~70명의 신규 환자가 발생한다. 특히 소아기(0~9세)와 노년기(60세 이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뇌전증 환자 중 70%는 발작을 억제하는 항경련 약물을 투여해 증상 조절이 가능하다. 나머지 30%는 약물을 투여해도 경련 발작이 재발하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에 해당한다. 이런 환자는 발작의 종류에 따라 뇌수술, 케톤식이요법, 카나비노이드, 미주신경자극술 등의 방법으로 치료를 이어간다.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는 두 가지 이상의 약물 치료를 받아도 경련 발작 증상이 이어진다. 근육 경직 과정에서 근육이 융해되기도 하고, 호흡 곤란으로 저산소증이 생기는 등 신체 손상률이 일반인 대비 최대 100배 높다. 이 때문에 약물 사용이 중요한데 한국은 일부 뇌전증 신약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표적으로 SK바이오팜이 자체 개발한 국산 신약인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의 경우 미국 매출이 약 4387억원으로 SK바이오팜의 성장을 견인한 대표 품목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에선 허가를 받지 못했다.
세노바메이트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에서도 효과를 보여 뇌전증 치료의 ‘게임 체인저’라고 평가받는다. 임상 3상시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세노바메이트를 복용한 환자 28%는 발작이 완전히 사라지는 완전발작소실을 보였다. 기존 뇌전증 치료제들의 완전발작소실 비율은 3~4%에 불과하다. 지난해 8월 세노바메이트는 홍콩에 출시돼 중국 현지 생산시설까지 확보했지만, 한국에선 허가 신청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국내 판권을 갖고 있는 동아에스티에 따르면 올해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세노바메이트의 품목허가를 신청해 예상되는 급여 등재 시기는 오는 2026년이다. 환자들이 실제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는 시기는 2027년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뇌전증 신약 도입이 늦어지는 이유로 ‘코리아 패싱’ 현상을 지목했다. 김재림 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대부분의 환자는 약물로 잘 조절되지만 약물 난치성 뇌전증은 약을 추가하거나 수술, 식이요법 등 다른 치료를 함께 병행한다”며 “SK바이오팜의 세노바메이트, 벨기에 제약사 UCB의 ‘브리비액트’ 등 많은 뇌전증 신약이 개발됐지만 아직 한국에 공급되지 않은 약재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의 경우 비강 속에 뿌리는 스프레이 형태의 약이나 항문에 넣는 약 등 다양한 약재가 출시돼 있어 병원을 찾아가지 않아도 투약이 가능하다”면서 “뇌전증 응급 처치에 적절한 약들도 코리아 패싱 현상 때문에 도입되지 않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적극적인 신약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대원 뇌전증학회 이사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제약사들은 국내에서 허가받기 쉽도록 희귀의약품으로 개발해 외국에 먼저 내놓은 뒤 한국에 출시하는 전략을 취한다”라며 “20년 전에 만든 약가 제도 때문에 좋은 신약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며, 1936년에 나온 오래된 약을 지금도 쓰고 있다. 이제라도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