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장인이 무대에 앉아 부채를 깎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는 마치 세월을 깎는 듯 고요하고 진지하다. 장인의 삶과 기술, 시간을 무대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창극 공연 ‘장인의 발걸음’ 중 한 장면이다.
국가무형유산 선자장 보유자인 김동식 장인의 ‘장인의 발걸음’이 오는 10월1일부터 전북 전주시 풍남동 전주한옥마을 내 하얀양옥집에서 다시 무대에 오른다. 하얀양옥집은 과거 전북 도지사가 머물렀던 공간으로, 현재는 전북문화관광재단을 통해 문화복합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장인의 발걸음’은 소리꾼 1명, 장인의 시연 1식, 그리고 장인의 인생과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으로 구성된 공연이다. 장인의 기술과 감각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공연 전후 전통 디저트와 음료를 제공하고, 관람객과 장인이 직접 대화하는 인터뷰 시간이 주어지는 등 이색 경험이 가능한 공연이다. 지난 6월 열린 네 차례 공연에서 높은 관객 만족도를 기록하며 무형유산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시도로 주목받았다.
‘장인의 발걸음’이 주목받는 이유는 전통공예 기술을 단순히 보여주는 기존 방식을 넘어 관객과 직접 대화하는 독특한 공연 형태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 있다. 전통공예를 시연하고 전시하는 형태의 복원형 콘텐츠는 고령의 장인에게도 부담이 컸고 관객에게도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장인의 발걸음’은 장인의 삶을 드라마처럼 구성, 함께 느끼는 무대로 만들어 관객이 깊게 몰입할 수 있게 했다. 부채 제작 시연은 물론 전통 판소리, 다큐멘터리 영상, 지역 공예와 로컬 디저트가 어우러지는 등 공연을 넘어 직접 감각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2015년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로 인정된 김동식 장인은 지금도 매일 작업실에서 나무를 깎고 종이를 붙이며 70년째 부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전주 아중리, 일명 가재미 마을에서 14세부터 부채 제작을 시작, 외조부 라학천, 외삼촌 라태순 명인의 손길 아래 전통을 익혔다. 관객들이 김 장인의 개인 서사와 지역의 역사성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전주 대표 관광지 전주한옥마을 하얀 양옥집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장인의 발걸음’이 탄생한 배경엔 K콘텐츠 브랜딩 에이전시 프롬히어가 있었다. 2022년 설립된 프롬히어는 지역을 중심으로 전통공예 장인과 함께 전시, 공연, 영상, 인터뷰 등 100건이 넘는 콘텐츠를 직접 기획·유통해 온 콘텐츠 플랫폼 기업이다. 설지희 프롬히어 대표는 “‘장인의 발걸음’은 장인의 삶과 기술 그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공연으로, K공예 콘텐츠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장인들의 발걸음’을 후속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인의 발걸음’은 사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서 200명이 넘는 시민들에게 참여 신청을 받으며 공공성과 지지 기반을 입증했다. 전통공예 콘텐츠가 전통시장, 지역 관광, 문화산업을 잇는 새로운 모델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이번 프로젝트에 투자한 박병욱 컴퍼니디 대표는 “장인의 발걸음은 문화예술 분야 민간 투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공연”이라며 “단기 수익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통 기반 창작물에 대한 투자 생태계를 넓히고, 문화 콘텐츠 산업의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장인의 발걸음’은 다음달 1~4일 총 4차례에 걸쳐 오후 7~9시 전주한옥마을 하얀양옥집에서 열린다. 공연 90분, 인터뷰 30분으로 구성된 국가무형유산 선자장 김동식 보유자의 인생과 기술을 담은 종합 공연으로 로컬 음료와 디저트가 함께 제공된다. 이번 공연은 프롬히어가 주관하며, 전북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