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다 쏟고 싶지 않지만” 박찬욱 감독도 ‘어쩔수가없다’ [쿠키인터뷰]

“영화에 다 쏟고 싶지 않지만” 박찬욱 감독도 ‘어쩔수가없다’ [쿠키인터뷰]

영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인터뷰

기사승인 2025-09-27 06:00:13
박찬욱 감독. CJ ENM


모두 입을 모아 기복이 없다고 하는 사람, 스스로도 천성이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겠지’ 식이라는 사람, 하지만 영화를 만들 때만큼은 기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 전부 박찬욱 감독을 소개하는 말이다. 이번에도 ‘기를 쓰고’ 만든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돌아온 박 감독을 23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뤘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가 해고된 후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24일 개봉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박 감독이 작정하고 웃기게 만든 영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코미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특유의 유머 코드가 돋보인다. 시종일관 평온한 표정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지만 “작품의 세계는 별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저는 인물들과 연결성이 참 적고, 캐릭터에 자신을 많이 투영하지 않는 타입의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상상할 수 있거든요.”

‘고추잠자리’ 시퀀스가 특히 그렇다. 만수, 그리고 범모(이성민) 아라(염혜란) 부부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통에 총을 놓고 처절하게 벌이는 난투극을 담았다. 박 감독은 평소답지 않게 파격적인 유머를 사용한 이유를 묻는 말에 이처럼 운을 뗐다. “그렇죠. 그러게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이번에는 이렇게 해야지’ 같은 계획을 세운 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인물을 따라가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시작이 ‘음악을 크게 튼다’, 이런 상황이라면 고함을 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에너지가 확 올라가 버려요. 고양된 상태에서는 뭐든지 다 과장되고 강렬해지잖아요. 그러다 보니 엎치락뒤치락 몸 개그를 활용한 코미디가 돼 가더라고요. 큰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블랙코미디’ 장르도 못박아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처음부터 원작 소설 ‘액스’보다는 웃길 자신이 있었단다. 이는 ‘어쩔수가없다’를 꼭 만들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더 웃길 가능성이 보였죠. 공동 각본가 3명이 다들 제일 먼저 했던 말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피지컬 코미디로 발전할 줄은 몰랐지만요. (이)병헌 배우도 시나리오 읽고 제일 먼저 한 말이 ‘웃겨도 되냐’는 거였어요. 잘못 읽은 건지 걱정이 됐나 봐요. 그래서 저는 ‘웃겨도 돼요. 웃길수록 좋아요’라고 답했죠.”

각색을 거치면서 만수의 살인을 미리를 비롯한 가족이 알아차린다는 점이 바뀌었는데, 이는 영화의 근간과 맞닿아 있다. “근본적인 차이를 만드는 변화예요. 아들이 먼저 보고, 아내도 알게 되죠. 만수는 자기 가족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이 연쇄 살인 때문에 이 가정은 붕괴됩니다. 이게 얼마나 허망한지에 대한 얘기가 됐죠. 정말 거대한 패러독스이자, 이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점입니다.”

박찬욱 감독. CJ ENM


만수는 물론, 그와 어쩐지 닮아 있는 범모는 실직 후 제지업 외에는 다른 길을 모색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도 박 감독도 왜 하필 제지업이었을까. 

“원작에 있는 제지 업계를 벗어나 볼 생각도 했어요. 제지 공장 촬영 허가 받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만한 걸 결국 못 찾았어요. 일단 종이는 우리 생활에 가까이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종이를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으니 그들의 세계는 특별하고 전문적으로 보이죠. 그리고 종이는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잖아요. 쉽게 구겨버리고.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첫 키스를 ‘습자지만큼 부드럽다’고 표현할 만큼 너무나 소중한 거예요.”

인력 감축으로 인한 만수의 해고로 시작된 이야기는 후반부 인간을 대체하는 AI(인공지능)를 명징하게 비추며 확실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만수의 퇴근에 맞춰 공장의 불이 차례대로 꺼지는 장면도 상징적이다. 

“공장에 들어서면 깜깜한 상태에 불을 하나씩 인위적으로 켜고 ‘인간이 왔다. 내가 너희를 통제할 거야’라며 환호성을 지르죠. 하지만 막상 하는 일이 없어요. 공장장이 롤을 두드려 보는 행동도 이미 공장장이 필요 없다고 했어요. 만수는 AI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사람의 감각만 한 게 없지, 뭐 이런 거죠. 그렇지만 그 위에서는 기계가 이미 두드리고 있죠. 공장 안 로봇을 VFX로 새로 그려 넣고 더 이상 수정은 없다고 다짐했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만수가 퇴장할 때 멀리서 불이 하나씩 꺼진다는 거였어요. AI의 판단인데, 이제 할 일 다 한 인간은 꺼지라는 거죠.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닌, 텅 빈 공간을 채운 암흑이 그를 밀어내는 겁니다.”

만수에게 제지가 있다면, 박 감독에게는 영화가 있다. 제지업과 영화산업 모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 겹쳐 보인다. 하지만 그는 만수와 다르고 싶어 했다. “만수나 범모처럼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기의 모든 것으로 삼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묘사하고는 있는데, 자신이 그런 것에 대해 더 반성도 되고요. 영화를 못 만들면 나는 죽은 목숨인가? 그러면 안되잖아요(웃음). 영화인들이 다 그렇겠지만, 영화 작업이 삶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제 조금씩 비중을 줄여가려고 해요. 너무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 현명하게 살고 싶습니다.”

심언경 기자
notglasses@kukinews.com
심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