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재난’ 외로움에 응답하다 [데스크 창]

‘보이지 않는 재난’ 외로움에 응답하다 [데스크 창]

김성일 쿠키뉴스 편집국장

기사승인 2025-10-31 08:00:05 업데이트 2025-11-03 14:10:35
게티이미지뱅크

26세 취업준비생 A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좌절감이 크다. 대학에 입학한 B는 부모의 권유로 택한 전공을 쫓다가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30세 C는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이들은 가급적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 방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길게는 수년간 이어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추산한 고립·은둔 청년의 규모만 54만명에 달한다.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낙인, 인간관계 실패, 혹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 등이 발목을 잡는다. 좁은 방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써도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은 벅차기만 하다. 기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압박감은 고립을 끊지 못하는 굴레가 된다고 한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또 벗어난 뒤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쉽지 않다. 

과거엔 공동체가 이웃의 안부를 자연스럽게 챙겼다. 하지만 도시화, 기술화에 따라 삶의 단위가 세분화되면서 개인의 자율성이 커진 대신 공동체의 응집력은 약해졌다. 비대면 생활과 1인 가구 확산, 디지털 의존 등은 ‘관계 단절’의 배경이 됐고, 일상에 녹아든 외로움을 넘어 고립 위기에 처한 사례가 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조사에선 서울시민의 절반 이상이 정신건강 문제를 안고 있다고 호소했다. 정신적으로 병이 있어도 상당수는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정신건강 문제는 특히 10대 청소년기, 20·30대 청년기에서 가장 비중 높은 자살 원인으로 꼽히는 만큼 사회가 책임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이런 흐름이 사회적 리스크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외로움 없는 서울’ 정책의 일환으로 화재(119), 범죄(112) 등으로 이뤄진 긴급전화 체계에 ‘외로움 안녕 120’을 포함시켰다. 외로움을 느끼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언제든 이 콜센터를 이용할 수 있다. 외로움도 ‘신고’할 수 있는 사회적 응급상태로 본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개통 한 달 반 만에 3000건이 넘는 전화가 몰렸다는데, 공적 지원을 청하는 절박한 사연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담을 통해 위기 신호가 감지되면 고립예방센터나 복지기관으로 즉각 연결된다. 

일방적 지원 대신, 시민 스스로 관계를 복원하도록 유도하는 과정도 주목을 받는다. ‘서울마음편의점’이란 곳에선 커피를 마시며 상담을 받고, 같은 고민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취미활동이나 봉사를 함께한다. ‘편의점’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활용해 마음의 경계를 낮추는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운영은 전문 상담사와 심리회복 경험자가 맡는다.

이밖에도 고립 상태를 극복한 사람들이 상담에 참여하는 ‘모두의 친구’ 제도는 관계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데 방점을 뒀다. 행정이 ‘복지 공급자’에서 ‘관계 촉진자’로 옷을 갈아입은 셈이다. 

일각에선 “외로움 등 감정적 부분까지 공적으로 간섭해야 하나”라는 우려를 낸다. 외로움을 관리 대상으로 삼으면 개인의 감정을 낙인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타당한 얘기다. 그러나 이 같은 개입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하기에 앞서, 그간 ‘행정 부재’가 외로움을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치닫도록 방치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울증, 고독사, 자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이미 크게 불어났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은 자살 등에 의한 손실이 다른 질병군을 뛰어넘었다고 짚었다. 외로움을 방치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재난’을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울러 서울의 실험이 성과를 높이려면 외로움을 수치로만 측정하려 하기보단 사람과 사람을 다시 연결하는 사회적 회복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외로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새로운 사회적 연결망을 다진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효율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이 사회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감정과 감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나약함이 아닌 인간이라는 증거다. 고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빛이 될 수 있다.
김성일 기자
ivemic@kukinews.com
김성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