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거대 금융지주들이 최근 잇따라 수십조원 규모의 ‘생산적 금융 지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생산적 금융 기조에 맞춰 우리금융지주가 가장 먼저 80조원 규모의 지원 대책을 내놓았고, 이어 하나금융지주 100조원, 농협금융지주 108조원 규모의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부동산 중심의 자금 쏠림이 성장 산업으로 이동하는 전환점처럼 보인다. 금융이 혁신기업과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해 실물경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발표된 규모가 과연 ‘신규 자금 공급’을 의미하는 걸까. 최근 만난 한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어떻게 수십조원을 새로 지원할 수 있겠나”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금융권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창조금융’, ‘혁신금융’, ‘녹색금융’ 등으로 정부 정책에 맞는 지원 대책을 발표해 왔다. 이 과정에서 기존 대출의 이름을 바꾸거나 정책성 자금을 합산해 총액을 부풀려온 전례가 적지 않다. 이번 지원 계획 역시 상당 부분 기존 대출의 명칭만 바꿔 포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자금 공급은 기대보다 훨씬 작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발표 시점 역시 예사롭지 않다. 금융지주 회장 및 주요 경영진 인선이 진행되는 국면과 맞물리면서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금융사들이 정부 정책 기조에 맞춰 지원 계획을 내놓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 금융산업은 관치금융을 넘어 최근 ‘정치금융’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정권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금융은 대표적인 라이선스 산업이며, 주주 구조 특성상 ‘주인 없는 기업’으로 불린다. 인사 문제에서 정부와 금융당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앞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신한·KB·우리·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모두 교체된 전례도 있다. 그동안 ‘용퇴’라는 이름 아래 지주 회장이나 은행장이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반복됐다. 경영진 인선이 정권 교체와 함께 물갈이되는 구조에서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추는 것은 금융사 입장에선 일종의 ‘생존 전략’에 가깝다. 선도적으로 지원 계획을 발표한 우리금융이 회장 선임과 맞물려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권 입맛에 맞게 수치만 부풀린 지원 계획은 정권 변화와 함께 사업이 흐지부지되는 문제를 반복시켜 왔다.
생산적 금융은 특정 정부의 국정 기조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되는 과제다. 이는 금융사의 사업 방향뿐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적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다. 돈은 본래 위험이 적은 곳으로 흐르지만, 안정만 추구하는 금융은 결국 자신의 미래 수익 기회를 갉아먹는다. 정부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방향에 따라 실행에 나서는 것은 결국 금융사의 몫이다. 생산적 금융이 구호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책임 회피이자, 장기적으로 금융산업 자체의 성장 기회를 놓치는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대한 숫자를 내세운 재포장 경쟁이 아니다. 수십조원이라는 돈이 실제로 누구에게 흘러가고, 어떤 성과와 변화를 만드는지가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력, 시장성 등 정성적 요소를 평가할 수 있는 심사 체계의 고도화, 장기 투자에 대한 내부 인센티브 구조 개선, 투자 이후 효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사후 관리 체계 등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이번 생산적 금융 논의가 한국 경제의 성장 발판이 되기 위해서는 금융권의 진정성 있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아울러 정부도 금융권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개입을 자제하고 시장 원리를 존중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