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유연성 보장된 국가만 신약 도입”…약가제도 개선 필요성↑ [생명의 값③]

“제도 유연성 보장된 국가만 신약 도입”…약가제도 개선 필요성↑ [생명의 값③]

기사승인 2025-11-14 06:00:10
미국이 약가를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최혜국 대우 가격(MFN)’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제약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자국 내 약값을 낮추기 위한 미국의 압박이 한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약가 결정과 신약 도입 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약값 문제가 아닌 생존과 직결되는 것으로, 발 빠르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로벌 약가 정책의 파급력이 국내 제약·보건환경에 어떤 충격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3편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글로벌 제약사들이 국내 시장에서 신약 출시를 지연하거나 기존 품목을 철수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혁신 신약에 대한 보상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자들에게 합리적인 약가로 치료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해외 시장에서 한국 약가가 불리한 참조 기준으로 활용되는 문제를 제도 개선을 통해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4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최혜국 대우 가격(Most Favored Nations, MFN)’ 정책을 계기로 국내 약가제도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기준에 맞게 신약의 혁신성을 고려한 약가 책정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 거론되는 약가 제도 개편 방안에는 △이중약가제 도입 △점증적 비용-효과비율(ICER, Incremental Cost-Effectiveness Ratio) 유연화 △신약 건강보험 등재 기간 단축 등이 꼽힌다.

MFN 정책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이중약가제가 주목받고 있다. 이중약가제란 해외에서 참조하는 의약품 가격을 표시가격으로 지정하고, 실제 거래가격과의 차액을 제약사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환급하는 제도다. 이중약가제는 성과기반 위험분담제(RSA) 방식을 써 일부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에 한정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는 약가 공개로 인한 해외 참조 가격의 하락을 막으면서 환자에겐 환급을 통해 실질적인 치료 접근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정부도 이중약가제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국내 개발 신약에 대해 이중약가 계약이 가능하단 조항을 넣은 ‘약제의 결정 및 조정 기준’ 일부개정안을 고시했다. 이에 따라 △혁신형 제약기업 △식품의약품안전처 신속심사 허가 △국내 임상 수행 조건을 만족한 경우 기존 환급형 위험분담제 대상 약제처럼 이중약가제를 적용한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도 MFN 정책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며 “신약 도입이 지연되거나 철수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약에 대해 보상을 강화해 신속 등재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나라 약가가 지나치게 투명하게 공개돼 참조가격으로 활용돼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서 “이중약가제도 등 약가 공개 방식과 가격 산정 구조를 보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단일가 고집, 신약 접근성 저해…“이중약가제 필요”

업계는 대부분의 선진국이 이미 위험분담제를 통해 이중약가 체계를 정착시켰다며 단일가를 고집하는 것은 경제적 손해와 환자 신약 접근성 저해로 이어진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013년 도입된 위험분담제는 신약의 불확실한 효과와 건보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약가와 환급 조건을 제약사와 정부가 사전에 합의하는 제도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국내 위험분담 계약 약제는 81개로, 환급액 규모는 약 5000억원에 달한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이 한국의 최저 수준 약가를 참조해 글로벌 시장의 약가까지 하락하면 제약사 입장에선 한국을 신약 출시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과 기반 위험분담제, 이중약가제, 선등재 후평가 등 제도의 유연성이 보장된 국가가 신약 도입의 우선순위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변영식 법무법인 세종 고문도 “이중약가제를 통해 추가로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를 연구개발(R&D) 기금 등으로 제약사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하도록 하면 선순환 구조가 이뤄질 수 있다”면서 “연 3조원의 추가 이익이면 10%만 출연해도 3000억원의 R&D 펀드가 조성된다”고 주장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ICER 임계값이 탄력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ICER는 새로운 치료법이나 약물이 기존 것에 비해 얼마나 더 효과적인지, 추가로 드는 비용은 얼마인지 등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ICER에는 임계값이 정해져 있는데, 보험급여 등재 시 ICER 임계값은 최대 허용치가 5000만원 선이다. ICER가 5000만원을 넘지 않으면 경제성이 인정되고 건강보험 급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존 치료제의 비용이 낮을수록, 신약이 연장한 생존 기간이 길수록 ICER 값은 불리하게 산출되는 구조다.

최근 면역항암제처럼 치료 효과는 높지만 비용이 큰 약이 연이어 출시되며 ICER 임계값이 최대 5500만원 선까지 확대되는 양상이지만, 업계는 신약의 혁신성을 보장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KRPIA에 따르면 2018~2022년 항암제에 수용된 국내 ICER 중앙값은 3990만원으로, 최소 2496만원에서 최대 4792만원 사이에서 설정됐다. 반면 영국, 캐나다 등 유럽국가의 ICER 값은 2300만원에서 최대 1억원대까지 지정됐다. 스웨덴은 질병 중증도에 따라 최대 1억3600만원까지 수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ICER 임계값 기준의 현실화, 신속 등재 제도와 병행심사의 상시화, RSA 확대 및 이중약가제 도입 등을 통해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약가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라며 “이는 단순한 산업 지원을 넘어 환자가 필요한 시기에 치료 기회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벽을 완화하는 조치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건보 약품비 지출 증가…‘성과 기반 약가 관리체계’ 제안

실사용데이터(Real World Data, RWD)를 기반으로 한 ‘성과 기반 약가 관리체계’를 도입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코리아 패싱 우려로 인해 단순히 약가를 인상하는 방식은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측면에서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혜선 경희대 약학대학 교수는 “실제 임상현장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신약의 효과와 경제적 가치를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기대 효과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엔 급여 조정이나 약가 인하를, 반대로 탁월한 임상 성과가 확인된 경우엔 약가 상향 조정의 인센티브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이러한 데이터 기반 약가 조정 메커니즘은 제약산업의 R&D 투자 의욕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건강보험 재정의 효율적 운영과 국민 건강권 보호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2023년 급여의약품 지출 현황.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우리나라 약제비 지출은 꾸준히 증가할 전망이다. 건보공단의 ‘2023년 급여의약품 지출 현황’에 따르면 총 약품비는 26조1966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보다 8.5% 증가한 수치다. 2023년 진료비 중 약품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23.6%로 전년보다 0.8%p 늘었다. 우리나라 경상의료비 중 의약품 지출 비용은 1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4.2%)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다. 60대 이상 환자의 약품비 비중은 58.1%로, 전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서 교수는 “건강보험 약품비 지출은 매년 1조원 이상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특히 최근 5년간 신약 약품비는 연평균 25%의 증가율을 보였고, 이는 전체 약품비 증가율 약 8%를 크게 상회한다”면서 “전체 급여 품목의 1% 미만인 신약이 전체 약품비의 약 13%를 차지하고 있어 현 추세가 지속될 경우 건보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질환의 중증도에 따라 재정 배분 비중을 차등화하는 ‘약효군별 총액관리제’ 도입도 제시했다. 서 교수는 “정부는 약품비 지출 구조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경증질환은 상대적으로 낮은 총액을 설정해 개인 부담을 유도하고, 희귀·중증질환에는 보다 높은 총액을 배정함으로써 공공 자원의 형평성을 높여야 한다”면서 “물론 이러한 제도는 사회적 합의와 재정 시뮬레이션을 통한 타당성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