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를 비롯해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안에 본업에 복귀해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에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지난해 12월3일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당시 수련병원을 사직해 재택의료센터 방문진료 의사로 일하던 장재영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전공의는 지인들과 모임을 갖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것은 ‘의료인 처단’ 내용이 담긴 계엄사령부 포고령이 발표되고서다.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해 처단한다’는 항목은 섬뜩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장 전공의에게 쏠렸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한 카페에서 쿠키뉴스와 만난 장 전공의는 1년 전 12·3 비상계엄을 이렇게 회고했다. 모두가 당황했다. 당황은 걱정으로, 걱정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분노하는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잡혀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거대한 국가 권력이 한 개인이나 집단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들이 무슨 해코지라도 당할까 ‘잠시 동안만이라도 병원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우려했다. 장 전공의는 곧바로 일하던 재택의료센터 원장에게 전화했다. “최악의 경우엔 내일 수련병원에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계엄이라는 것 자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잖아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한 후 업무개시명령이 떨어졌는데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이었죠. 지금도 왜 포고령에 ‘의료인 처단’ 문구를 넣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불법적인 비상계엄은 155분 만에 무산됐다. 동시에 10개월을 끌어온 정부의 의료개혁은 동력을 잃고 좌초됐다. 의정 신뢰관계는 치명상을 입고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전공의와 의대생들 사이에서 약해져가던 투쟁의 불씨는 이 기점으로 되살아났다. 복귀를 위해 타협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환자들에 대한 미안함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모두가 힘들었습니다. 취직도 안 되는데 수련 공백 기간이 길어지니 환자를 돌보던 때가 그리워졌습니다. 환자들에겐 한없이 죄송했습니다. 내년에라도 빨리 모든 게 정상화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비상계엄으로 깨졌습니다. 이번에 바꾸지 못하면 의료인은 계속 ‘처단 대상’ 취급을 받겠다는 인식이 확산했습니다. 그래서 의정 갈등이 더 오래 지속된 것 같습니다.”
무너진 지역·필수의료…‘불신’은 커졌다
장기화된 의정 갈등은 지역·필수의료 공백으로 이어졌다. 병원들은 적자에 시달리며 인원 이탈에 진료·수술을 줄였다. ‘응급실 뺑뺑이’는 일상이 됐으며, 건강보험 재정 등 사회적 재원이 낭비됐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지난 9월 전공의들이 복귀했지만, 이른바 ‘내(내과)·외(외과)·산(산부인과)·소(소아청소년과)’로 일컫는 필수의료의 고리는 더욱 약해졌다. 아직까지 지역 책임의료기관조차 필수진료과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의료 정책 추진의 파트너가 처단 대상이 되고, 의정 간 반목이 심해진 원인으로는 켜켜이 쌓인 ‘불신’이 꼽힌다. 의정 갈등 사태 초기에 정부는 보건의료 위기단계를 최고 수준인 ‘심각’으로 상향하고, 대한의사협회(의협)에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를 명했다. 또 전·현직 의협 집행부를 업무 방해 등의 혐의로 고발하고 면허정지 처분을 가했다. 전공의를 대상으론 진료유지명령과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고, 수련병원들에 사직서를 수리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정부와 의료계가 어떻게 했으면 ‘의료인 처단’이라는 포고령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장 전공의는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생각해 봤지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한쪽엔 타협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는 국가 권력이 있었고, 또 다른 쪽엔 이번에 바꿔야 한다며 무조건 전진만 외치는 의료계가 있었다. 서로가 양보 없이 충돌하며 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장 전공의는 “유연함과 관점의 전환이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며 두 지점이 아쉽다고 했다.
“정부와 의료계가 서로 의료를 보는 관점이 달라 평행선을 달렸던 것 같아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는 허울뿐인 제도에요. 보건의료 분야 5개년 종합계획을 세웠으면 의료계를 파트너 삼아 오래 교감하며 논의를 이어가야 하는데 전 정부는 그렇지 않았던 거죠.”
대립에서 화합으로…“한국 의료는 바뀔 수 있다”
1년 전과 지금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던 의대 증원은 2027학년도 정원부터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의 추계에 따라 증원 규모를 정하기로 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취임 직후 환자·시민단체와 만나 “의정 갈등으로 불편을 겪게 해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의료계와의 신뢰 회복을 최우선 가치로 뒀다. 또 “지역·필수·공공의료를 확실하게 강화하겠다”면서 모두가 공감할 의료 혁신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대립보단 화합을, 불통보단 소통을 강조했다.
장 전공의는 대한민국 의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지난 정부의 과오를 답습해선 안 된다고 했다. 실패한 과거를 뒤쫓기보단 미래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며 젊은 의료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정부는 긴 호흡으로 인내심을 갖고 미래의 의료인을 키워내고,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정책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의정 사태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의대생·전공의들도 많았어요. ‘내가 뭘 해도 바뀌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미 지난 일들이지만, 그간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곱씹어 봐야 합니다. 정부가 기회를 만들어주고 젊은 의료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미래의 한국 의료는 바뀔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의견이 서로 다르더라도 배척하지 않고 타협점을 찾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무너진 신뢰관계…“믿고 지켜봐달라”
1년 반 넘게 이어진 의정 간의 반목은 무수히 많은 상처를 남겼다. 국민들이 낸 건강보험 재정은 출혈이 계속되고, 환자들은 치료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했다.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는 수많은 상담·신고가 접수됐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2월19일부터 올해 2월18일까지 1년간 상담 6260건이 접수됐으며, 이 중 피해신고서가 들어온 사례는 933건이었다.
반목이 깊어질수록 의사를 향한 국민들의 분노는 커졌다. 시민들은 의사를 ‘의새’, ‘돈벌레’, ‘의주빈’, ‘의마스’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의주빈’은 N번방 사건 범죄자인 조주빈에, ‘의마스’는 민간인을 학살한 하마스에 의사를 빗댄 표현이다. 환자와 의사를 하나로 묶던 ‘라포’(신뢰관계)는 무너졌다.
“저부터 바뀌겠습니다.” 장 전공의는 지난 사태를 거쳐오며 국민들이 의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의료계도 잘못이 있고 충분히 비난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의사들을 믿고 의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적어도 의사와 환자는 진료실 안에서 한 팀입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진료실 안에서 정말 최선을 다합니다. 젊은 의사들도 나한테 오는 아픈 사람을 잘 치료해주고 싶어서 적어도 10년, 15년씩 공부합니다. 그러니까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의지해주세요. 그동안의 잘못된 행동들, 발언들에 대해서 자정하기 위해 많이 노력할 겁니다. 믿고 지켜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