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의 발전은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암 치료 환경을 바꿔놨다. 전체 암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은 70%를 넘었고, 수많은 이들이 병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청년기에 암을 겪은 이들은 학업, 취업, 인간관계 등 삶의 중요한 국면에서 오랜 기간 깊은 단절을 경험한다. 사회적 시선과 제도의 공백 속에서 혼자 버텨야 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치료를 넘어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여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7편에 걸쳐 함께 고민해 본다. [편집자주] |
암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받는 절박한 순간, 청년 암환자들은 치료에 몰두하느라 인생의 향방을 정하는 중요한 결정을 놓치기 쉽다. 치료가 끝난 후 암생존자들은 충분한 정보와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한다. 치료를 넘어 젊은 암생존자들 앞에 놓인 긴 삶을 지켜주기 위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커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쿠키뉴스와 만난 전문가들은 청년 암생존자를 위한 지원 정책이 ‘암생존자 통합지지’라는 큰 틀 안에 포함돼 있지만, 청년들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은 미흡하다고 입을 모았다. “치료가 급해 가임력 보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후회는 청년 암생존자들이 많이 토로하는 미충족 요구 중 하나다. 암 치료 전 생식세포(난자·정자) 동결 같은 가임력 보존에 대한 정보와 의사 결정 시간이 부족했고, 이는 완치 후 결혼과 출산 등 인생의 중대한 계획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서지연 부산시의회 의원은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간 날 주치의가 난자 동결 희망 여부를 물었지만, 난자 채취로 인해 몸에 가해질 영향이 걱정돼 끝내 하지 않았다”며 “난임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암 치료가 더 급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암은 생명과 직결되다 보니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일에 대한 대비보다 당장의 치료가 중요했다. 서 의원은 “뒤늦게 인생의 변곡점이 단절돼 버리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치료 뒤로 떠밀린 미래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에 따르면, 최근 유방암이나 자궁내막암과 같은 여성호르몬 관련 암을 진단받은 가임기 여성이 증가하고 있다. 암종에 따라 다르지만, 일부 유방암이나 혈액암, 고환암처럼 치료 과정 중에 난소나 정자가 영향받는 암은 완치가 돼도 생식세포에 독성이 생길 수 있다. 또 항암 치료 기간이 길어지고, 나이가 들어 건강이 나빠지면 가임력이 떨어질 수 있다.
저하된 생식기능은 되돌아오기 어렵기 때문에 의료기관에선 가임기 환자뿐만 아니라, 29세 미만 환자들에게 생식능력 보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관련 정부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난소·고환 절제, 항암치료 등 의학적 사유에 의한 생식건강의 손상으로 영구적 불임이 예상돼 가임력 보전이 필요한 남녀 모두에 대해 ‘난자·정자 냉동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여성은 최대 200만원, 남성은 최대 30만원으로 생애 1번 본인 부담 비용의 50% 이내에서 지원한다.
모든 암환자에게 난자·정자 동결 기회가 부여되는 셈이지만, 선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김희정 서울아산병원 유방외과 교수는 “대부분의 환자가 병원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내가 암이 맞을까’, ‘수술은 언제 하지’, ‘항암치료는 꼭 받아야 하나’ 등 치료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며 “그런 상황에서 ‘난자를 미리 동결해야 한다’고 말씀드려도 ‘바로 하겠다’고 반응하는 환자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항암화학요법을 받으면 생식기능이 급격하게 감소되기 때문에 이미 항암치료를 받은 뒤엔 가임력 보존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김 교수는 “막상 환자들에게 생식세포 동결에 관해 설명해도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드물다. ‘결혼 안 할 거고 아이 생각도 없다’고 말하는 20~30대 젊은 여성들도 많다”면서 “하지만 인생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출산을 고민하게 될 수도 있는데 항암치료가 시작되면 그런 선택의 기회조차 사라질 수 있다”고 짚었다.
상처와 불안 가진 사람들…그래서 ‘생존자’
암 치료 후 빠른 일상 회복을 위한 지원도 강화돼야 한다. 중앙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가 2024년 한 해 동안 암생존자통합지지사업을 이용한 성인 암생존자 3976명에게 ‘지난 일주일 동안 어려운 점’을 조사한 결과 ‘피로’가 48.8%로 가장 높았다. 뒤이어 △걱정 또는 불안 48.2% △수면 46.8% △통증 33.6% △나 자신을 돌보기 29.0% 순으로 나타났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암생존자의 고용 확대를 위해 우선 해결돼야 할 정책으로는 35.2%가 ‘암생존자에 대한 인식·편견 개선’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장윤정 국립암센터 중앙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장은 “‘암생존자’라는 용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항암치료 과정에서의 고통, 병동에서 마주한 죽음,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단순한 ‘경험’ 그 이상”이라며 “‘암경험자’라든가 사회적으로 더 친근한 용어나 접근할 수 있는 명칭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정책적으로는 이러한 관점이 유지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생존자’라는 명칭은 현재 ‘질환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의 상처와 불안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더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장 센터장은 “직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음에도 그로 인해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육 참여 자체를 막는 경우도 있다”며 “젊은 암생존자들 사이에서 회복탄력성과 극복 의지를 가진 분들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단 점은 반가운 일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암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질환이다. 중요한 것은 조기에 발견하고, 지속적인 관리로 회복의 길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며 “무너지는 순간도 있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피력했다. 향후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는 소아, 청년, 노인 등 각 세대가 겪는 고유의 어려움과 특성을 반영해 콘텐츠를 만들고, 맞춤형 지원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정부는 암생존자 특성에 따른 프로그램을 세분화하는 등 암생존자들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정책에 반영한다는 입장이다. 장재원 보건복지부 질병정책과장은 “암생존자는 치료 후 신체적·심리적 건강관리를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사회 복귀를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역사회와 전문가 논의를 통해 암생존자가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발굴하고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청년 암생존자의 건강한 사회 복귀 지원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