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중은행들이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성과에 따라 금리를 깎아주는 ‘ESG 연계대출’을 앞다퉈 늘리고 있지만, 상당 자금이 석탄·가스 발전 등 고탄소 기업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ESG라는 이름과 달리, 정부의 녹색 기준을 충족한 자금도 전체 여신의 1%에 불과했다.
25일 쿠키뉴스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이 취급한 ESG 연계 대출 총 20조7341억원 가운데 1조2383억원이 고탄소 산업에 공급된 것으로 집계됐다.
ESG 연계대출은 기업의 탄소 감축 등 환경(E) 성과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S)이나 투명한 경영 구조(G) 등 지표를 반영해 금리 우대를 제공하는 구조다. 은행들은 이를 통해 기업의 탄소중립 투자를 유도하고, 친환경 설비 투자·공정 개선을 유도한다고 밝혀왔다.
은행별로 보면 NH농협은행은 ESG 연계대출 가운데 발전·철강·석유화학 등 고탄소 산업에 흘러간 자금이 유일하게 증가세를 보였다. 2023년 이후 3년 연속 증가(1511억→4548억)했다. 신한은행은 2023년 정점(8733억원)을 찍은 후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가장 큰 규모(6400억원)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2023년부터 공급 잔액이 각각 1108억원과 327억원까지 줄며 하향 추세를 나타냈다. 하나은행은 자료상 ESG 연계대출 중 고탄소 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 않았다.
정부가 탄소 감축 활동으로 공인한 ‘녹색경제활동 대출’ 규모도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해당 대출은 한국형 녹색 분류체계(K-택소노미)에 따라 환경 개선 효과가 검증된 프로젝트나 기업에 자금을 대주는 금융 활동을 말한다.
지난해 말 기준 5대 은행 모두 전체 기업 여신 중 녹색경제활동 비중은 1%를 밑돌았다. NH농협은 0.73%(9693억원), 신한은행 0.5%(9528억원), KB국민은행 0.18%(3388억원), 우리은행 0.12%(1705억원)에 그쳤다. 하나은행은 2025년 신규 취급액 기준 30억9000만원(0.003%)을 공급했지만, 잔액 기준으로는 0원(0%)으로 파악됐다.
은행권은 통계상 한계와 현실적 제약을 감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석탄 등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구조상 관련 수입신용장도 탄소 관련 여신으로 잡힌다”며 “통계적으로 ESG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국가 성장을 위한 생산적 금융 공급과 탄소중립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실무적으로 난도가 높은 과제”라고 토로했다.
고탄소 업종에 대한 금융 지원이 탄소 중립을 위한 과도기적 단계라는 항변도 뒤따랐다. 고탄소 기업의 공정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금융의 역할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고탄소 기업이라 하더라도, 탄소를 줄이는 장비 설치 등을 위해 실행되는 시설 대출은 금융사가 직접 장려하고 지원해야 할 부분”이라며 해당 대출은 ‘전환금융’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문제는 녹색·전환금융의 기준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은행은 통상 기업의 자금 사용 목적과 탄소 감축 효과 등을 따져 해당 여부를 판단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업의 ESG 정보 공시가 표준화돼 있지 않다. 특히 공급망 전반의 배출량을 의미하는 스코프3(Scope3)는 측정과 검증이 쉽지 않다. 결국 녹색·전환 여부에 대한 판단은 상당 부분 개별 금융사의 해석과 내부 심사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이같은 불확실성은 정책 및 규제의 불확실성과 맞물린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국회 민병덕 의원실이 발간한 ‘2024 한국 ESG 금융 백서’에 따르면, 금융권이 꼽은 ESG 금융 활성화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정책 및 규제의 불확실성’(29.4%)이었다. 공통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ESG·전환금융이라는 이름만 붙은 자금이 시장에 먼저 풀리며 외형만 부풀려졌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정부도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ESG 금융추진단’ 회의를 열고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최종안과 단계적 의무공시 방안을 논의했다. 오는 4월에는 ‘ESG 공시 로드맵’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공시 역량이 충분한 대형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를 도입하고, 기업 부담이 큰 공급망 배출량(Scope 3)은 충분한 유예기간과 면책 규정을 두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공시 체계가 정착되면 신뢰도 높은 데이터를 토대로 대출·투자 심사를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전환금융 가이드라인’도 연내 마련한다.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에서 산업 부문 배출을 21~30% 줄이겠다고 제시한 만큼, 감축 부담이 큰 철강·석유화학·발전 등 고탄소 산업의 설비 전환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제도의 정교한 설계가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우면 기업들의 저탄소 전환 의지를 오히려 꺾을 수 있고, 반대로 기준이 허술하면 탄소 배출이 많은 산업이 ‘전환’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기존 구조를 유지하는 빌미로 악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의 자기보고 의존 구조를 공시 의무화와 국제기준 연동으로 상당 부분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고탄소 산업도 전환금융 대상에 포함하되, 절대 배출 감소 등 검증 가능한 경로 중심으로 엄격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KPI(핵심성과지표) 미달 시 페널티를 부과하는 등 기업 전환 의지를 자극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부연했다.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부는 기후금융 공급 확대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확정해 시장에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며 “은행권 또한 정부 정책 기조를 단순히 수용하는 수준을 넘어, 기후 리스크를 반영한 여신심사체계를 구축하는 등 저탄소 경제 전환을 위한 체질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