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필의 視線] ‘왕과 사는 남자’와 한명회

[조한필의 視線] ‘왕과 사는 남자’와 한명회

기사승인 2026-02-26 10:37:43 업데이트 2026-02-26 11:22:35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과 엄흥도(왼쪽), 그리고 한명회.  네이버 블로그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600만명을 넘어섰다. 관객들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는 단종에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으론 유배지 촌장 엄흥도의 단종 시신 수습에 조그만 위안감을 느낀다.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은 한명회다. 그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역을 맡았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과 함께 조선 유교사회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1994년 TV사극 ‘한명회’가 방영되면서 조금 달라졌다. 불우한 처지를 딛고 권력 정점에 오르는 그의 인생 역전 스토리가 시청자 마음을 샀다. 악인 일변도 평가에서 조금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로 다시 악역 위치로 돌아왔다. 이참에 한명회가 금성대군과 단종의 죽음을 몰고온 당사자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처럼 그가 단종을 금성대군 유배지 순흥과 가까운 영월로 귀양 보내 역모의 올가미를 씌우려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1457년 음력 6월 21일)에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켰다”고만 나온다. 많은 신하들이 서울에 거주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상소를 올린 데 따른 조치다.

엿새 후인 6월 27일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한다는 첩보가 궁궐에 올라왔다. 그가 순흥에 온 지 만 1년 됐을 때다. 금성대군은 그로부터 4개월 후 사약을 받는다. 믿었던 삼촌의 죽음은 단종의 자살을 몰고 왔다.

9월 중순부터 신하들이 세조에게  “금성대군과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리라”라고 주청하기 시작한다. 좌찬성 신숙주와 영의정 정인지가 전면에 나섰다. 두 명 모두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신숙주는 “금성대군이 대역을 범하였으니,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노산군을 끼고 역모를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역시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며 처형을 주장했다. 

세조가 머뭇거리자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가 가세했다. “전하께서 사사로이 용서하실 바가 아닙니다[非殿下所得私赦]”라며 강하게 몰아부쳤다. 사사로운 골육의 정으로 처형을 미룰 게 아니라는 무서운 말이다. 

세조가 중국 요나라 태조가 동생의 모반을 용서한 고사를 들어 신하들 요청을 물리쳤다. 하지만 정인지가 “요나라는 오랑캐이니 본받을 것이 못된다”면서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세조는 “왕이 골육지친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라며 언성을 높였다.

신하들의 처형 주장은 집요했다. 한 달 후인 10월 10일, 승정원이 금성대군의 처벌을 청했으나 세조는  “차마 골육을 해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날 사간원과 사헌부, 의정부와 육조가 연이어 처형을 건의했다. 다음 날도 계속됐다. 세조는 “내가 마땅히 여러 대신과 의논할 것이니, 경(卿)들은 재촉하지 말라”고 했다. 며칠 후 사헌부·사간원 연합 상소가 올라왔다. 

세조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하게 거부하던 태도에서  “생각하며 헤아리는 중”이라 했다. 10월 18일, 양녕대군·효령대군 종친의 처벌 주장은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금성대군의 숙부이자 단종의 종조부다. 세조가  “오늘은 술이나 마시지요. 이 일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했는데 이튿날 양녕이 또 찾아왔다.  “대역과 같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은, 달리 생각할 바가 없습니다. 청컨대 대의로써 결단하소서.”

사흘 후 세조는 결국 종친과 신하들 말을 따르고 말았다. 육조 판서에 이어 양녕대군, 영의정 정인지가 또 나섰다. 양녕은 “용서해 국법을 문란케 해선 안된다”고 했고, 정인지는 “대의가 있는 곳에는 피붙이도 주멸(誅滅)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당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던 신하들은 금성대군과 단종의 죽음을 원했다.  백성들 사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대해 어지러운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명분이 없고, 정통성·도덕성 하자도 분명했다. 찬탈세력은 불안했다.  “반기를 드는 사람은 모두 죽여야 우리가 산다.”  한명회는 이들 세력의 강력한 일인이었다. 
/ 천안·아산 선임기자

천안 수신면의 한명회 묘역. 연산군 때 부관참시되는 수난을 겪었다.  천안시
조한필 기자
chohp11@kukinews.com
조한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