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K팝 팬들에게 지난 며칠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오는 28일(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열릴 예정인 K팝 그룹 미래소년의 콘서트를 정부가 취소했다는 소문이 돌면서다. 공연을 주관하는 주터키한국문화원이 일정을 재공지하며 사태가 일단락됐지만, K팝을 향한 터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소문에 불을 붙인 곳은 터키 언론사 예니 아킷이다. 이슬람 보수주의 일간지로 유명한 이 매체는 지난 13일 낸 기사에서 K팝 그룹이 “전 세계적으로 젠더리스(성 구분 없는) 라이프 스타일을 강요한다”고 표현하며 “이 공연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에는 “젊은이들은 K팝을 좋아하지만, 그것(K팝)은 금지돼 있다”고 쓴 케말 킬리츠다로울루 공화당 당수의 말을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현지 언론사에서 미래소년 콘서트가 취소됐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보수 일간지 밀리개제테는 15일 “28일 열릴 예정이었던 K팝 콘서트가 시민들의 민감한 반응 때문에 취소됐다”고 보도했다. 온라인 언론사 디켄도 같은 날 “보수적 우려로 공격 대상이 됐던 공연들이 하나 둘 취소됐다”며 “SNS에서 표적이 된 K팝 콘서트도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미디어스코프, 오네디오 등 다른 언론사도 잇따라 소문을 실어 날랐다.
이번 공연은 한국과 터키의 수교 65주년을 기념한 행사로, 현지 팬들은 무료로 볼 수 있게 했다. 온라인에서 해당 공연이 취소됐다는 소문이 확산하자 주터키한국문화원은 16일과 17일 연달아 SNS에 공연 포스터를 올렸다.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안내를 에둘러 표현한 걸로 풀이된다. 쿠키뉴스는 주터키한국문화원에 공연 개최 여부를 문의했지만 답변 받지 못했다.
터키는 K팝이 높은 인기를 끄는 국가 중 하나다. 지난해 트위터에서 K팝을 가장 많이 언급한 국가 14위에 들었을 정도다. 그런데도 현지에서 K팝 콘서트가 위협받는 이유는 급격히 보수화된 현지 분위기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알려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이후 터키에선 여성을 억압하고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친정부 성향의 보수 언론사들이 K팝을 공격하는 근거도 ‘동성애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K팝 특유의 젠더프리(성 구분 없는) 속성을 두고 ‘청소년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주고 가족을 해체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터키 온라인 언론사 허베7(뉴스7)은 17일 ‘K팝은 왜 그렇게 위험한가’라는 제목으로 낸 기사에서 “이 산업의 배경은 극단적 선택과 마약, 성(性) 중립과 연결돼 있다”고 비난했다. 아흐메트 아킨 이스탄불 메데니예트대 교수는 이 매체를 통해 “K팝 가수는 인간 본성을 파괴하고, 남성과 여성을 제거해 성 중립을 만들려는 집단”이라고 매도했다. 밀리개제테는 “K팝이 부도덕을 퍼뜨린다”고 표현했다.
터키에선 한 때 정부가 K팝 금지령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터키 친정부 성향 언론사 밀리예트는 지난해 8월 “‘K팝이 젊은이들을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가족을 거부하고 성별 없는 생활 방식으로 이끌고 있다’는 주장을 터키 노동사회가족부가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데리야 야닉 노동사회가족부 장관이 소문을 부인했지만, 현지 K팝 팬들의 분노는 거셌다. SNS에선 ‘K팝을 금지해선 안 된다’는 해시태그가 번졌다. 민족주의 성향인 터키 승리당 대표 위미트 외즈다으는 “과거 금속세공사를 사탄으로 싸잡았던 이들이 지금은 K팝이 아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다”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K팝 공격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