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동맥고혈압 치료 패러다임 바뀌는데…커지는 신약 허가·급여 공백

폐동맥고혈압 치료 패러다임 바뀌는데…커지는 신약 허가·급여 공백

폐동맥고혈압 환자 평균 연령 47세
일상생활 제한되는 환자들…“계단 오르는 것도 힘들어”
‘에포프로스테놀’ 도입 지지부진
“유연한 약가 제도 운영 절실”

기사승인 2025-08-26 18:35:11
게티이미지뱅크

효과적인 신약의 등장으로 폐동맥고혈압 치료 환경이 전환점을 맞았지만, 여전히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 표준 치료제로 쓰이고 있는 약이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다. 환자들이 최적의 약으로 신속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허가·급여 절차가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기범 서울의대 교수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폐동맥고혈압 치료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 발제를 통해 “폐동맥고혈압은 경제활동이 활발하고 가정 기여가 높은 40대 후반의 중년 여성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질환”이라며 “적절히 치료받지 못하면 2~3년 내 사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토론회는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하고, 대한폐고혈압학회와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가 주관했다.

의료계에 따르면 폐동맥고혈압은 좁아진 폐동맥으로 인해 우심실 압력이 상승해 오른쪽 심장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고 이로 인해 돌연사 위험이 증가하는 희귀난치질환이다. 초기 단계에선 증상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으나, 질병이 진행됨에 따라 호흡곤란, 기침, 피로, 흉통, 현기증 및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비특이적인 증상과 복잡한 진단 과정으로 인해 진단도 어렵다. 증상 발현 후 진단까지는 최대 3년이 소요된다.

폐동맥고혈압은 원인 기저질환에 따라 여러 하위 유형으로 분류된다. 전체 폐동맥고혈압의 35.3%에 해당하는 ‘결합조직병에 의한 폐동맥고혈압(CTD-PAH)’은 전신경화증, 전신홍반루푸스, 혼합결합조직병, 류마티스관절염 등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선천심장병을 동반하는 폐동맥고혈압(CHD-PAH)’은 선천성 심장 결손이 폐순환에 과도한 부하를 줘 발생하며 전체 폐동맥고혈압의 31.2%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특발폐동맥고혈압(IPAH)’, ‘유전폐동맥고혈압(HPAH)’, ‘문맥폐동맥고혈압(PoPH)’가 있다.

폐동맥고혈압은 세계적으로 여성에게 더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국내 폐동맥고혈압 등록 레지스트리(KORPAH)를 보면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평균 연령은 47세로,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4.1배 많다. 폐동맥고혈압 환자들은 신체활동, 사회생활 전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건강한 성인이 1㎞를 걸을 때 폐동맥고혈압 고위험 환자는 보행거리가 330m에 그친다.

김 교수는 “폐동맥고혈압 환자 대부분이 일상생활에 큰 제약을 받고 있다. 계단 한 층을 오르는 것도 힘들고, 요리나 전화 통화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 역시 간병 스트레스와 사회적 고립을 호소하고 있어 질환에 대한 인식 개선과 실질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폐동맥고혈압 치료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토론자들은 효과적인 폐동맥고혈압 치료제를 도입하기 위해 유연한 약가 제도 및 패스트트랙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대현 기자

고위험군일수록 돌연사 위험이 높지만, 치료 옵션은 제한적이다. 쓸 수 있는 약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폐동맥고혈압 치료는 단일 약제를 단계적으로 늘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2개 약제를 같이 쓰는 병용요법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럽심장학회(ESC)가 지난 2022년 발표한 ESC/ERS 폐고혈압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진단 시점부터 엔도텔린 수용체 길항제(ERA)와 PDE-5 억제제(PDE-5i)의 병용요법을 권고하고 있다.

폐동맥고혈압 치료제에는 글로벌 제약사 바이엘의 sGC(가용성 구아닐산 고리화효소) 자극제 ‘아뎀파스’(성분명 리오시구앗), MSD(머크)의 액티빈 신호전달 억제제(ASI) ‘윈레브에어’(소타터셉트) 등이 있다. 아뎀파스는 2014년 6월 품목허가 획득 10년여 만에 보험급여에 등재됐으며, 윈레브에어는 연내 출시를 앞두고 있다.

고위험군에선 글로벌 제약사 GSK의 ‘에포프로스테놀’(제품명 플로란) 등 프로스타사이클린 제제(PCA)의 정맥 또는 피하 주사 치료를 중심으로 한 병용치료를 권고하고 있다. 에포프로스테놀은 중증 폐고혈압 환자에서 생존율 개선 효과가 입증된 최초의 치료제이자 현재까지도 가장 강력한 단일요법 생존율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에포프로스테놀은 일본에서도 1999년 도입된 이후 100% 급여 지원을 받아 85% 이상의 5년 생존율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지만, 국내에선 사용조차 할 수 없다. 지난 2020년 희귀의약품으로도 지정됐지만, 도입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폐동맥고혈압 의료진은 제약사들이 한국의 약가가 압도적으로 낮아 손해를 보는 구조여서 국내 신약 출시를 망설인다고 지적했다. 정욱진 가천대 의과대학장은 “일본은 폐동맥고혈압의 5년 생존율이 96%에 이르는데 이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전문센터 중심 치료 체계 덕분”이라며 “한국도 생존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약제 접근성, 진료체계, 환자 발굴 시스템 전반에 걸친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정 학장은 “해외 의료진들과 교류에서 ‘에포프로스테놀도 없는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고 안타깝다”면서 “에포프로스테놀 같은 폐동맥고혈압 핵심 치료제는 전 세계 36개국에서 쓰이고 있으나 글로벌 제약사가 국내 시장의 수익성 문제로 진입을 꺼리고 있어 정부 차원의 유연한 약가 제도 및 패스트트랙 제도 운영이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이어 “희귀난치성 질환 특성을 반영해 약제 급여 평가 기준을 완화하고, 전문 질환군으로의 분류 개편, 질병 코드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환자들도 효과적인 의약품을 가격 부담 없이 쓰길 바라고 있다. 윤영진 한국폐동맥고혈압환우회 파랑새 대표는 “국내는 약을 하나 처방한 뒤 상태가 악화되면 하나씩 더하는 방식이지만, 선진국은 처음부터 병용치료를 적용해 환자의 상태를 더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라며 “국내에서도 신속한 신약 도입과 건강보험 급여 적용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정부는 혁신성이 있는 약제에 대해 경제성 평가 기준을 완화하는 등 제도 개선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는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을 운영 중이다. 이 시범사업은 품목 허가, 급여 평가, 약가 협상 과정을 함께 진행해 신약의 건강보험 등재 기간을 단축하는 제도다. 

김국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관리실장은 “희귀질환 치료제가 늘어나고 있지만, 고가라는 현실적 문제가 있어 지속 가능한 지원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라며 “심평원의 목표는 효과가 입증된 신약을 적절한 환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가능한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으로 앞으로도 신약 접근성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