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탄저백신 비축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 해외 국가들은 탄저균 같은 생화학무기를 이용한 테러 위협에 대비해 매년 기준에 맞춰 백신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은 탄저백신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비축 확대 계획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삭감돼 그 기준이 모호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7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정부는 오는 12월까지 국내 개발 탄저백신 ‘배리트락스주’를 비축할 계획이다. 그간 탄저백신은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했지만, 지난 4월 GC녹십자와 질병청이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국내 자급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올해부터 국산 탄저백신 생산을 본격 시작했지만, 비축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질병청은 지난 4월 제1차 감염병관리위원회를 열고 국내 개발 탄저 백신의 비축 확대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제2차 국가비축물자 중장기계획(2025~2029년)’을 확정했다. 지난 2017년 감염병관리위원회가 심의·의결한 ‘탄저 백신 국내생산 비축계획’의 목표치는 300만 도즈(100만명분)였다. 수정된 목표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300만 도즈를 상회한다는 의미다.
비축을 확대한다는 계획과 달리 정부는 내년도 탄저백신 구입 예산안을 삭감했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 탄저백신의 10만 도즈 구매 분량인 32억1100만원을 편성했다. 이는 올해 15만 도즈 구매분량인 48억1700만원보다 16억600만원 삭감된 수준이다. 내년 예산안에 따르면 당초 목표치인 300만 도즈의 3% 확보에 그친 것이다.
재정당국과의 논의 과정에서 예산이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질병청 관계자는 본지에 “질병청이 10만 도즈만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내년도 예산은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추진해 최종 목표치에 맞게 비축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축 기준은 보건 안보와 관련돼 있어 공개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비축 기준에 맞춰 예산을 짠 것이 아니라, 예산에 맞춰 백신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으로 풀이된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 영국 등의 주요 국가는 생물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민과 정규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축 기준에 맞춰 백신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은 ‘탄저 대응 시나리오 및 위협 평가’를 통해 생물테러 사건, 보안 평가, 접종대상 수(군 장병·응급처치자·의료종사자·고위험자), 인구 밀집도, 백신 생산 가능량, 탄저병 발병의 잠재적인 영향, 예방접종 질병의 예방 효과, 전쟁 태세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탄저 비축 물량을 산정하고 있다. 미국 비축량은 성인인구 접종 대상자 수 대비 2~7.5% 수준이다. 미국 보건부의 2017~2021년 예산 자료에 따르면 인구 수 대비 비축량은 4.7%이며, 2940만 도즈(980만명분)를 비축하고 있다. 이밖에 영국은 성인 인구의 3.7%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들이 백신 물량을 매년 확보하는 이유는 탄저균이 공기 중에 100㎏만 살포돼도 최대 3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는 치명률 97%의 살상용 무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해외 유입과 테러 위험 우려가 커지며 세계 각국이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라오스에서는 탄저병 감염사례가 129건이나 보고됐으며, 사망자도 1명 나왔다. 미국은 지난 2001년 9·11 테러 직후 우편물을 통한 생물 테러가 발생해 22명이 감염되고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며 탄저균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국내도 안심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1994년 경북 경주에서 탄저병에 걸린 소를 주민들이 섭취해 23명이 감염되고 이 중 3명이 사망했다. 2000년 창녕군에서 폐사한 소를 주민들이 섭취해 3명이 감염되고, 2명이 사망했다. 2017년에는 귀순 북한 병사에게서 탄저균 항체가 발견돼 북한의 탄저균 무기 개발 가능성이 제기됐다. 2019년 일부 언론이 “북한의 탄저균 테러에 대비해 정부 주요 인사가 탄저균 백신 치료제를 접종했다”고 보도하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탄저균 백신을 전 국민에게 보급하라”는 요구가 쇄도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북한이 보낸 ‘오물 풍선’이 생물 테러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높아졌다.
탄저백신 비축 물량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하고, 예산을 늘려 테러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은 “미국, 영국 등은 탄저균 생물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탄저백신 비축사업을 계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며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진 우리나라의 경우 이들 국가의 비축 기준과 사례를 구체적으로 참고해 본 사업을 재정비할 필요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제1급 법정 감염병으로 지정된 탄저균 생물테러 대비를 위해 국산 탄저백신의 개발 및 허가를 완료한 만큼 부처 간 일원화된 정책을 추진해야한다”며 “관련 예산 확보의 안정성을 구축해 생물테러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나아가 국가 보건 안보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