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와 과학의 가교 ‘의사과학자’…병원 벗어나 신약 개발 선봉에

의료와 과학의 가교 ‘의사과학자’…병원 벗어나 신약 개발 선봉에

카이스트 교수 창업 ‘소바젠’, 7500억 규모 기술 수출
의사과학자 이끄는 ‘오가노이드사이언스’, 재생치료제 개발
서울의대 의사과학자 양성사업 148명 중 48명만 수료
“병원·연구원·산업 연계 ‘트랙형 양성 시스템’ 필요”

기사승인 2025-11-23 06:00:08
쿠키뉴스 자료사진

학령인구 감소와 의과대학 쏠림으로 국내 과학·의료 인재 기반이 흔들리며 ‘의사과학자’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 우수 연구자의 해외 유출까지 가속화되며 의사과학자가 국가 전략 분야의 핵심 인재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제약·바이오 기업의 대표로 변신해 신약 개발의 최전선에서 성과를 내는 의사과학자들이 주목받고 있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의사과학자는 의료 면허를 가지고 있으면서 의학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를 말한다. 국내 의사과학자 중 약 25%는 기초의학계, 60%는 임상 분야에서 연구중심교수로 활동 중이다. 이 중 제약바이오산업계에 몸담은 의사과학자는 10~15%로 추정된다.

환자를 진료하면서 동시에 연구 현장에서 새로운 치료법과 기술을 발굴하는 의사과학자는 더 이상 ‘연구하는 의사’에 머물지 않는다. 신약 개발과 의료기술 혁신, 바이오산업 생태계 구축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며 국가 전략 분야의 핵심 인재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엔 의사 출신으로 대학에서 기초연구를 수행하던 의사과학자가 글로벌 제약사에 7500억원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주목받았다.

지난달 이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가 창업한 벤처기업인 소바젠은 난치성 뇌전증 RNA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해 이탈리아 제약사인 안젤리니파마에 5억5000만달러(한화 약 7500억원) 규모의 기술 수출을 성사시켰다. 이 계약은 기초과학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며 기초과학 분야 연구개발(R&D) 예산 확보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초연구실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중개연구와 벤처 창업을 통해 혁신 신약 후보로 발전돼 글로벌 시장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의사과학자가 2018년 창업한 바이오 기업이 지난 3월 코스닥에 상장해 국가 첨단전략기술인 ‘오가노이드 재생 치료’ 분야를 선도하는 곳도 있다. 오가노이드사이언스는 오는 2027년 국내 상용화를 목표로 오가노이드 재생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오가노이드사이언스를 창업한 유종만 대표는 의사과학자로, 2015년 차의과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오가노이드 연구를 시작했다.

오가노이드사이언스는 2023년 정부가 지정한 국가첨단전략기술 중 하나인 ‘오가노이드 재생 치료제 기술 보유’ 인증을 받았다. 국가첨단전략기술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 전지, 바이오 등 국가 안보와 기술 경쟁력 측면에서 중요한 17개 기술을 선정해 전폭적인 지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제도다.

오가노이드사이언스는 오가노이드 기반 재생치료제 ‘아톰(ATORM)’과 임상시험 플랫폼 ‘오디세이(ODISEI)’를 주요 제품으로 갖고 있다. 대표 파이프라인인 ‘아톰-씨(ATORM-C)’는 내시경으로 채취한 환자의 장 조직을 배양해 장 오가노이드를 만들고 이를 손상된 장 부위에 투여하는 염증성 장질환 치료제다. 현재 아톰의 임상이 진행 중이며, 국내 기업들과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해외 수주도 확보하기 시작했다.


정부, ‘국가과학자’ 신설…의사과학자 양성 마중물 기대

정부는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근 ‘다시 과학기술인을 꿈꾸는 대한민국 국민보고회’에서 ‘과학기술 인재 확보 전략 및 R&D 생태계 혁신 방안’을 발표하며 ‘국가과학자’ 제도 신설을 공식화했다. 이 제도는 우수 과학기술 인재 확보를 위해 세계적 수준의 연구업적을 보유한 연구자 20명 내외를 국가과학자로 선정해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국가과학자들에겐 매해 1억원 규모의 연구활동지원금을 지급하고, 국가 R&D 기획과 정책 마련에도 참여시킨다는 계획이다. 또 기초연구 확대를 통한 안정적 연구지원 강화와 함께 정년 후에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정년 후 연구지원 사업을 신설하기로 했다. 기업 연구자들의 성장을 위한 ‘기업연구자육성기금’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의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사업’과 ‘글로벌 의사과학자 양성사업’ 등 각종 사업 시행에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만큼, 국가과학자 제도가 의사과학자 양성에 마중물이 될지 주목된다. 양성사업의 취지는 임상 치료 경험과 과학 연구 전문성을 토대로 질병 연구와 의료기술 혁신에 기여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었지만, 사업 취지가 무색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실제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실이 서울대 등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올해까지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에 참여한 서울의대 재학생은 148명으로 이 중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은 48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진출한 분야는 연구학술기관 23명(47.9%), 의료보건기관 22명(45.8%)이었다. 다른 대학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 9월 기준 보건복지부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을 수료한 77명 가운데 임상·연구 분야에 종사하는 이는 36명(46.8%)이었다.

전문가들은 명확한 진로 모델이 부족해 연구보다 임상 업무에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연구 인프라·급여·병역 등 구조적 장애 요인도 남아 의사과학자 양성이 어렵다며 임상과 기초를 잇는 지속 가능한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려면 의사과학자와 같은 융합형 인재가 필수”라며 “의료기관·연구기관·산업계가 함께 참여하는 ‘트랙형 양성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임상 현장에서 얻은 문제의식을 연구로 연결하고, 다시 산업과 기술로 확장할 수 있는 순환 구조가 필요하다”면서 “기업과 병원 공동연구 인센티브 등 제도 개선도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