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유행하던 지난 2021년, 전국에서 타이레놀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당시 국내엔 아세트아미노펜 단일 성분 일반의약품이 타이레놀을 포함해 70종이나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국민 대부분은 상표만 알고, 성분은 모르는 탓에 약국에서 ‘타이레놀’만 찾은 것이다.
의약계는 최근 장기화되고 있는 의약품 수급 불안정 사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성분명 처방 제도화’를 꼽는다. 특정 회사의 제품을 처방하는 현재의 방식 때문에 수급 불안정 사태가 일어난다는 지적이다. ‘성분명 처방’은 지금처럼 의사가 처방전에 특정 제약사의 약제 상표명을 기재하는 대신, 성분명을 적도록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타이레놀’이란 제품명이 아니라 ‘아세트아미노펜’이라는 성분을 처방전에 적는 식이다.
김진석 숙명여자대학교 약학대 교수는 2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 건강권 확보를 위한 의약품 품절사태 해소방안’ 정책 토론회에서 “원인은 다양하지만, 특정 회사의 제품명 처방으로 인해 의약품 수급 불안정 사태가 더욱 가중됐다”고 설명했다.
호흡기 질환 치료제인 슈도에페드린 염산염이 대표적이다. 현재 국내 제약사 7곳이 이 치료제를 생산하고 있는데, 이 중 3곳이 자진 품목 취하를 신청했다. 나머지 4곳 중 2곳은 수급이 불안정해 환자들이 적기에 처방받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김 교수는 “알아보니, 남은 4개 회사 모두 한 회사로부터 똑같은 원료를 공급받고 있다”며 “상품명이 아닌 성분명으로 처방했으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수급불안정 의약품 대부분은 동일한 성분의 대체 의약품이 존재한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신고된 수급불안정 의약품 중 국가필수의약품 성분에 해당하는 품목은 40.6%에 달한다. 수급 불안으로 신고된 품목 중 91.3%는 동일성분 및 제형으로 생물학적 동등성에 따라 대체 가능한 의약품이 1개 이상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 교수는 “현재는 환자들이 처방전을 들고 뺑뺑이를 돌고 있는 상황”이라며 “성분명 처방을 제도화하면 의사, 약사, 환자 모두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며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와 제약회사의 연구개발 증가, 약국 내 과도한 불용재고 의약품 해결, 선진국형 처방 및 조제 환경 정착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전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는 동일한 성분의 의약품임에도 국가마다 사용하는 명칭이 달라 의약품 데이터 표준화 작업이 어려운 상태이다.
오옥희 퍼스트디스 대표(차의과학대학 약학대학원 겸임교수)는 “만성질환자들의 경우 원래 복용하는 약물과 급성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받는 약물의 성분이 중복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복합 성분을 포함한 의약품의 개별 성분을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없기 때문”이라며 “의약품 관리 처방 및 효율성을 위해 성분명, 함량, 단위, 제형 등 정확한 분류 및 국제 기준에 맞춘 표준화가 요구된다”고 밝혔다.
성분명 처방 시 국제 기준에 맞춘 표준화가 가능하다 보니, 환자들의 약물 오남용도 방지할 수 있다고 짚었다. 오 대표는 “성분명 처방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의약품 품절과 공급 불안정이 해소될 뿐 아니라 환자의 약물 정보에 대한 이해도가 향상돼 약물사용 오류가 감소할 것”이라며 “나아가 다양한 의료기관에서 생성된 개별 환자의 약물 기록을 통합해 동일한 정보 소스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의약품 품절 사태의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남후희 보건복지부 약무정책과장은 “(품절 사태를 빚는) 약의 대체제가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품목에서 수급불안이 나타나는 사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대체조제나 성분명 처방이 언급되고 있다”며 “대체조제가 제도화됐지만 현장에서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면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의약품 품절로 대체조제율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라, 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선영 식품의약품안전처 의약품관리지원팀 사무관은 “식약처는 아세트아미노펜 사태(타이레놀 품절 사태) 당시에도 긴급 생산 명령을 내리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면서 “지난해부터 대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복지부, 심평원, 유통협회, 제약바이오협회 등이 참여하는 논의체를 구성해 수급 불안정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분명 처방에 있어서는 복지부와 지속적으로 협조하면서 논의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