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중국’을 외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K’라는 이름 아래 한국 산업은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지만, 그 기반은 여전히 중국의 부품·소재·자본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배터리 원료에서 태양광, 통신장비, 드론, 생활 소비재까지, 산업 곳곳에 스며든 중국 의존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쿠키뉴스는 ‘K-산업 구조中심’를 통해 ‘탈중국’의 구호와 ‘종속’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추적했다. 기술 자립을 내세운 산업정책의 그늘을 해부하고, 산업 자립의 구호가 실질적 공급망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편집자주>
기사승인 2025-12-08 06:00:11 업데이트 2025-12-08 09:10:44
한국 산업 전반이 중국의 전방위 추격에 흔들리고 있다. ‘탈(脫) 중국’을 외치지만 배터리·재생에너지·반도체·유통(K-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산업 기반은 중국산 원료·부품·규격·자본에 종속된 구조가 굳어졌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선 한국의 10대 수출 업종 중 절반이 이미 중국 경쟁력에 뒤처졌으며, 2030년에는 10개 업종 모두 중국에 밀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산업계에서는 “중국의 추격은 미래의 위협이 아닌 직면한 현실”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CATL이 공개한 낙스트라 배터리. AP 연합뉴스 배터리 공급망, 원료 단계부터 중국이 틀어쥐다
한국 배터리 산업의 취약성은 공급망 맨 앞단에서 드러난다. NCM(니켈·코발트·망간 기반 삼원계) 양극활물질의 올해 전체 수입량 중 중국산 비중은 75.7%에 달한다. 양극재의 핵심 연료인 전구체는 94.1%, 수산화니켈은 96.4%에 이른다. 음극재(흑연)의 97~98%도 중국산이다. 사실상 원료·정제·소재 전 단계가 중국에 장악된 구조다.
공급망이 특정 국가에 과도하게 집중되면 가격·수급 변동이 산업 전반으로 전이된다. 배터리 3사는 북미를 중심으로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지만, 대체 생산국의 정제·가공 역량 자체가 중국을 따라가지 못해 속도전이 쉽지 않다.
정치권도 우려를 드러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이재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첨단 전략산업 경쟁력은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며 60일 수준인 비축 물량 확대와 재자원화 기술 등 구조적 대응을 촉구했다.
신재생에너지(태양광) 발전설비. 연합뉴스 재생에너지, 부품 잠식 넘어 ‘기술 종속’ 단계로
태양광·풍력 산업은 중국 중심 생태계에 둘러 쌓여있다. 패널을 만드는 핵심 부품인 태양광 셀의 국산 점유율은 2019년 50.3%에서 올해 4.9%로 폭락한 반면, 중국산은 38.3%에서 95.1%까지 치솟았다. 풍력발전기용 주요 부품인 체인·휠은 최근 5년간 99.9%가 중국산이었고, 전동기·발전기용 무품 역시 중국산 비중이 84.6%에 달했다.
문제는 ‘부품 점유율’만이 아니다. 중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자사 기술 규격을 사실상 국제 표준으로 만들어가는 ‘룰 세터’ 단계에 진입하면서, 국내 기업의 진입 장벽이 구조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그 사이 국내 R&D는 오히려 후퇴했다. 태양광 핵심기술인 탠덤전지 예산은 341억(2022년)→238억(2025년)으로 30% 삭감됐고, 전체 태양광 R&D 예산도 절반 가까이 줄었다.
부품 국산화의 기준이 되는 KS 인증마저 실효성이 떨어진다. 중국산 반제품을 국내에서 소량 조립만 해도 ‘국산 인증’을 받을 수 있어 ‘택갈이’ 관행이 산업 생태계를 왜곡하고 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제조·원격제어 주체가 불분명한 장비가 국산으로 유통되면 보안 리스크는 물론 사고 책임도 불명확해진다”고 짚었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개발한 저전력 D램인 'LPDDR5'. CXMT 홈페이지 캡쳐 반도체는 호황이지만…소부장 국산화 30%대 ‘취약한 뿌리’
인공지능(AI) 수요 폭증으로 반도체 수출은 역대급 호황을 이어가고 있지만, 산업 기반은 취약하다. 산업의 뿌리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국산화율은 여전히 30%대에 머문다. 중국이 71조 원 규모의 ‘빅펀드 3기’를 통해 반도체 국산화를 가속하면서 한국 소부장 기업의 입지가 더 빠르게 위축되는 모습이다.
중국 CXMT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제품과 비슷한 성능의 D램을 공개했고, YMTC 역시 삼성(286단)에 근접한 270단 낸드를 앞세워 세계 시장 점유율 4위(13%)에 올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한국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충분히 키우지 못해 첨단 패키징 경험을 쌓기 어려웠다”며 “소부장은 산업의 뿌리이다. 뿌리가 약하면 중국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은 지난 4월 광저우 소재 화장품 가품 제조 현장을 단속했다. 이곳에서 국내 뷰티 브랜드 메디큐브를 베낀 가품이 다수 발견됐다. 에이피알 ‘K-유통·브랜드’ 흔드는 중국발 이중 압력
중국산 위조·모조품은 K-뷰티·K-푸드·아이돌 굿즈 등 K-브랜드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 5년간 해외 플랫폼에서 적발된 K-브랜드 위조상품은 87만건에 이른다. ‘한국산’ 이미지를 앞세워 현지에서 상표를 먼저 등록하는 ‘무단 선점’ 사례는 중국 비중(51.7%)이 절반을 넘는다. OECD·EU 자료에서도 전 세계 위조품의 45%가 중국산으로 파악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개별 기업의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를 넘어 K-뷰티 전반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유통 생태계의 경우 중국발 ‘초저가 공습’으로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해외직구 거래액은 2019년 2조7000억원에서 지난해 8조원으로 5년만에 3배 가까이 늘었고, 그중 중국산 비중은 61.4%에 달한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96.7%가 중국 e커머스 플랫폼 피해를 호소했고, 79%는 “사실상 대응을 포기했다”고 답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오세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격 격차가 10분의 1 수준까지 벌어지고, 안전 기준도 없는 제품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제도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며 “이미 시장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10대 업종 모두 중국에 밀린다”…2030년 한국 산업 ‘경고등’
실제 자동차, 철강, 2차전지 등 한국 10대 수출 주력업종의 절반이 중국에 추월당했고, 5년 뒤에는 10대 업종 모두 뒤처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한국경제인협회가 10대 수출 주력업종의 매출 1000대 기업(200개사 응답)을 대상으로 최근 시행한 ‘한·미·일·중 경쟁력 현황 및 전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업들은 현대 최대 수출 경쟁국으로 중국(62.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미국 22.5%, 일본 9.5% 등의 순이었다. 오는 2030년 최대 수출 경쟁국 역시 중국이라 답한 비율은 68.5%로 가장 많았다.
업종별 경쟁력을 100으로 가정하면 중국은 이미 철강(112.7), 기계(108.5), 2차전지(108.4), 디스플레이(106.4), 자동차·부품(102.4) 등 5개 업종에서 한국을 앞섰다. 특히 2030년에는 10대 주력업종 모두에서 중국이 한국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인적 자원까지 결합되면서 산업 전반의 추격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며 “이 흐름이 지속되면 일부가 아니라 여러 산업이 한꺼번에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현장에서 크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