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19’로 고향 방문 자제가 불효 아닌 효도
- 새끼들 못 봐 아쉽지만, 나중에 오래 보려면 참아야지
- 노부부 가을걷이, 바리바리 싸서 자식들에게 택배
- 자식들도 건강식품 등 선물로 아쉬움 달래
- 화상통화가 그나마 큰 위로
-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더욱 가까워지는 한가위
[쿠키뉴스] 전남 신안· 곽경근 대기자 = “어이쿠, 우리 이쁜 새끼 그사이 또 많이 컷네”
“할머니, 할아버지 이번 추석에는 못 내려갈 것 같아요. 그렇지만 혜원이가 이만큼 사랑해요”
저녁상을 물리고 타지에 사는 손녀와 영상통화를 하는 어르신들이 손녀를 따라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더니 이내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한가위 명절을 일주일 앞둔 지난 23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에서 평생 논농사와 마늘, 양파, 대파 등 밭농사를 지으며 오순도순 사는 김응수(74) 할아버지와 김정심(73) 할머니 부부를 만났다.
오늘은 파밭을 둘러보고 온종일 시금치 파종을 했다는 할아버지는 나이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암태면 노인회장과 지역 공영버스 위원장을 맡은 할아버지는 70대 중반도 여기서는 젊은 편이라며 말한다.
코로나 19로 여기 섬 지역 역시 자식들 고향 방문을 자제하는 분위기라 우리도 일찌감치 자식들에게 연락해서 내려오지 말라고 했단다. 서운하지만 그래도 영상통화가 가능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자식들이 못내려오니 내일은 아침 일찍 자녀들에게 고춧가루와 기름, 호박 등 가을걷이한 농산물을 부칠 계획이라고 했다.
완도 취재를 마치고 목포를 지나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에서 천사대교를 건너 노부부가 사는 암태면에 다다르는 동안 다른 지역처럼 “불효자는 ‘옵’니다”, “얘들아 이번 벌초는 아부지가 한다. 너희는 오지 말고 편히 쉬어라”, “힘들게 내려와서 전 부치지 말고 용돈을 두 배로 부쳐다오” 등 재치는 있지만, 왠지 서글픈 고향 방문 자제 현수막은 걸려 있지 않았다.
온종일 농사일에 고단할 텐데도 자식들 자랑 좀 해달라고 하자 갑자기 어르신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할아버지는 “우리 손자가 이번에 고려대학교 약대에 합격했어. 공부를 잘하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얼마나 기쁜 줄 몰라, 이번에 내려오면 용돈 좀 두둑하게 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새끼들 얼굴 직접 못 봐서 많이 아쉽기는 하지” 할머니는 “TV에서 보니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디, 이번 명절은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그래도 자식들이 늘 안부 전화도 하고 맛난 것도 챙겨서 보내주고 마을에서 우리 부부를 참 부러워한다고 말한다. “그 놈의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가 문제야”라고 할머니는 덧붙였다.
- 노부부의 살아온 이야기
서남단 해상에 있는 암태도(岩泰島)는 돌이 많고 바위가 병풍처럼 섬을 둘러싸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섬 한복판에 승봉산(해발 355m)이 우뚝 솟아있고 원래는 보잘것없는 척박한 땅이었으나 일본강점기 갯벌을 막아 마명방조제를 쌓으면서 쌀을 비롯해 농산물 생산량이 섬치고는 넉넉한 편이다.
금술 좋은 노부부는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초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김 할아버지(당시 22세)는 눈이 크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김 할머니(당시 21세)에게 청혼했다. 당시 남자 형제로는 장남인 김 할아버지의 가족은 부모님을 합쳐 모두 12명의 대 식구였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어려운 시절에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큰아들과의 결혼 결심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때 무슨 콩깍지가 쓰여서 결혼했는지 몰라, 나 좋다고 쫓아다닌 선생님도 있었고 암태도에서는 그래도 인기가 좋았는데”라며 웃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자신의 조금 급한 성격을 잘 감싸줄 것 같은 청년 김응수의 선비 같은 품성과 성실함에 큰 점수를 줬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할아버지를 점수로 따지면 몇 점이나 되나요” 기자의 질문에 서슴없이 “기사에 안 쓴다면 이야기할께, 80점도 안돼”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할아버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 집사람은 100점도 넘지”라며 진심이라며 즉답했다.
농담처럼 한 이야기가 미안했던지 할머니는 그래도 우리 딸들은 자라면서 아버지 같은 사람만 나타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 말했단다. 그 사이 목포에 사는 큰 딸에게 전화가 와 잠시 통화를 했다. 대뜸 기자에게 취재 대상을 잘 못 선택했단다. “우리 엄마, 아빠 맨 날 싸우시는데 잘 싸우는 거 취재하러 오셨어요” 공무원 생활을 하는 큰 딸 역시 엄마처럼 반어화법의 고수인 듯 했다. 할머니와 큰 딸의 농담 덕분에 취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할머니 역시 대식구의 맏딸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보잘것없는 섬에서 두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삶을 일궜다. 농사만으로는 대식구가 먹고살기 어려워 할아버지는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에는 뭍으로 나가 막일도 하고 전남 영암의 친척집 맛김 공장에서도 몇 년간 열심히 일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에도 할머니는 야무지게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키웠다. 자식들 역시 성실한 부모 밑에서 누구 하나 속 썩이지 않고 형제들끼리 우애 있게 잘 자랐다. 김 공장이 어려워져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면 소재지에서 7년간 식당을 운영했다. 솜씨 좋은 할머니 덕분에 식당운영은 생각보다 잘 되 돈도 좀 벌었다고 했다.
부부는 한 사람도 대학 공부시키기 어려운 섬에서 4자녀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고 결혼도 시켰다. 아직 막내딸이 미혼이지만 “목포에서 큰 아파트 사서 혼자 잘살고 있다”며 별로 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굳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놓기 싫어서이지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어찌 편하기만 했을까? 자식의 사업실패로 어렵게 일군 재산을 많이 잃었고 할머니가 식도가 좁아져 식사가 어려운 특이한 병에 걸려서 병간호에 힘도 들지만, 노부부는 자녀들 뒤에서 잘되거나 못 되거나 묵묵히 응원하며 기도할 뿐이다.
아들 김세훈(52) 씨는 “부모님 세대가 다 그랬지만 특히 저희 부모님은 평생을 자식한테 아낌없이 쏟아 부어주시고 지금도 더 주고 싶어 하신다.”라며 “저희를 위해서 희생 많이 하셨는데 받은 만큼 잘해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이다. 더욱 이번 추석에는 고향 방문도 어렵고 겨우 며칠 전 건강식품 하나 보냈는데 왠지 마음이 무겁다. 두 분 모두 건강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월에 개통한 연륙교인 ‘천사(千四) 대교’ 덕분에 노부부가 사는 암태도를 비롯해 인근 자은도, 안좌도, 팔금도, 자라도, 추포도 6개 섬은 이제 육지나 다름없다. 그동안 자식들을 보기 위해 목포로 나가려면 유일한 교통수단은 뱃길 밖에 없었다. 자연히 뭍으로 떠난 자식들과 왕래가 쉽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는 자식들이 방문해 손녀가 신발을 두고 간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손녀가 그리워 며칠간 신발을 몸에 품고 다닌 적도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천사 같은 천사대교가 놓이면서 자식들이 수시로 집에 왔었는데 몹쓸 감염병이 돌면서 또다시 자식들 살 냄새 맡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70년 넘게 묵묵히 세상을 지켜온 김응수 할아버지는 “인생지사 새옹지마”다. 지금의 어려움이 지나면 분명히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기자 일행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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