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앞에 나오지 마" 사장은 말했다

"손님 앞에 나오지 마" 사장은 말했다

우리가 몰랐던 청년, 난민①

기사승인 2020-11-13 06:10:01
▲사진=난민 야스민(가명)씨가 육가공 공장에서 일할 당시 모습. 야스민씨 제공

청년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시대입니다. 취업, 내집마련, 결혼, 출산, 연애, 인간관계, 꿈까지.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놓아버릴 수 밖에 없다고들 합니다. 쿠키뉴스는 가장 낮은 곳, 잘 들리지 않았던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한국에 사는 ‘이방인’, 고국에 돌아갈 수조차 없는 ‘난민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쿠키뉴스] 민수미 기자·정유진 인턴기자 =“너 뚱뚱해”, “그만 먹으라니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인신공격에 야스민(가명·25·여)씨는 질끈 눈을 감았다. 검은 세상에 행복했던 순간이 스쳐 간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 그곳에 야스민씨의 학교가 있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인류학만한 학문은 없다. 사람이 모여 사회를 만들고 그곳에서 각종 문화가 생겨난다. 야스민씨는 그것들을 연구하는 게 좋았다. 어려운 학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한 회사에 들어가 마케팅 관련 일을 했다. 경제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 난민이 된 이유는 하나, 이집트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급진적인 무슬림이었고, 야스민씨를 14살에 결혼시켰다. 불행했던 결혼 생활은 그를 여성 인권에 눈뜨게 했다. 그는 남편이 일하러 간 사이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했다. 공부가 거듭될수록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SNS를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썼고, 가족으로부터 도망친 여성들을 도왔다. 야스민씨는 정부의 표적이 됐다.

눈을 떴다. 세상이 흐릿해 보이는 건 눈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시력으로 번호를 가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안경을 맞추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눈앞의 택배들을 분류해야 하고. 박스에 코를 박는다. ‘6, 아니 8인가….’ 시간은 흐르고 결국 욕이 날아왔다.

어떤 직장도 4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채용하지 않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뽑지 않았다. 운 좋게 자리를 얻어도 단기근무만 가능했다. 다른 난민들 역시 1년에 2~3번 회사를 옮겼다. 일도 모두 말할 수 없이 고됐다. 단순 노무 직종 현장은 주로 건장한 성인 남성을 선호했다. 당장의 생활고를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야스민씨에게 선택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인력사무소에 15만원의 수수료를 내고 육가공 공장으로 일을 옮겼다. 돌아가는 칼날에 차가운 고깃덩이를 넣고 자르는 일이었다. 작업은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났다.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1시간을 서 있었다. 한국인 근로자와 난민 근로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그들은 한 시간을 쉬었고, 야스민씨에게는 30분만 주어졌다. 그마저도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싸 온 도시락을 서둘러 입에 욱여넣고 지친 다리를 끈 채 작업장에 돌아가야 했다. 임금, 상여금 차별 역시 당연했다.

성희롱과 혐오 발언도 빈번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근무했을 당시 입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유색인종은 주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홀 서빙은 백인들만 할 수 있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너 잘라도 뭐라 하는 사람 없다”를 유행어 가사처럼 들어야 했다. 야스민씨는 “뚱뚱해” “살 빼” “그만 먹어” 등의 한국어 표현을 누구보다 빨리 배웠다.

힘든 일은 서로 손을 잡고 온다더니, 야스민씨의 인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자리에 맞춰 지방 곳곳을 전전해야 했다. 이사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집주인들은 난민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집을 내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평균 150만원의 임금으로 당연히 좋은 집을 구할 수 없었고, 근무 기간이 짧으니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이 계속됐다.

젊은 나이가 무색하게 심한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 일련의 노동 끝에 얻은 것은 허리 디스크였다. 한 달 내내 하혈한 적도 있다. 어렵게 찾은 산부인과에선 난소에 종양이 생긴 ‘난소낭종’이라고 했다. 정형외과 진료에 산부인과 치료까지. 야스민씨가 감당할 수 있는 진료비 수준은 이미 넘었다. 3개월에 한 번씩 받는 호르몬 테스트는 15만원, 6개월마다 처방받는 약은 20만원이었다. 야스민씨는 근본적인 치료 대신 진통제를 택했다. 사실상 포기였다.

야스민씨는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min@kukinews.com
정유진 기자
ujiniej@kukinews.com
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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