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상주=김희정 기자] 지난 2011년 슬로시티로 지정된 경북 상주시. 함창읍·공검면·이안면 지역이 그 대상이다. 상주의 특산물인 쌀과 곶감, 누에고치처럼 느리게 완성되는 보물이 이곳 슬로시티 이안면에 있다. 5대째 가문의 전통인 옹기를 빚는 정학봉 옹과 전수자 정대희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 상주옹기는 가문의 운명
정학봉(87) 옹은 지난 200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5-3호로 지정된 옹기 장인이다. 그는 지난 70여 년을 이안면 흑암골의 땅에서 나는 옥토와 진흙으로 옹기를 만들었다. 한평생 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옹기는 운명이다.
그의 고조부터 조부까지는 상주, 보은 일원의 옹기공장에서 옹기를 만들다가 상주옹기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며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그는 유년시절을 가마터에서 토기와 함께 보냈다. 잔심부름을 시작했던 14살 무렵부터 엄격했던 선친의 밑에서 본격적으로 옹기 빚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는 경북 지방에서 독 짓는 솜씨가 최고였고, 가족과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분이셨지. 건강을 위해 반주 외에는 약주를 안 하시고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어. 밥 많이 먹으면 잠 많이 잔다고 밥을 항상 적당하게 먹으라고 말씀하셨지.”그는 선친을 이렇게 기억했다.
지금은 옹기 제작에서 한발 짝 물러난 그의 뒤를 아들인 정대희(57) 선생이 잇고 있다. 대한민국전승 공예대전 입선과 함께 왕성한 창작을 하고 있다. 문화재관리과를 나온 손자 정창준씨도 옹기 일을 배우고 있다. 문경 찻사발 공모전 특선 등 다수의 입상을 한 재원이다.
한국도예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증손자 정웅혁군도 할아버지의 삶을 이어간다고 하니 8대로 이어지는 상주옹기의 미래는 그들이 빚은 옹기만큼이나 단단하다.
“전통 가마에 소나무로 구워야 옹기의 다섯 가지 색을 볼 수 있어요. 어린잎의 초록색, 나무속의 흰색, 나무 표피의 갈색, 송진의 흑색, 마른 잎의 황금색 말입니다. 옹기를 잘 들여다보면 그 다섯 가지 색이 보이지요. 이는 소나무를 이용해 구워낸 옹기만의 매력입니다.”
정 선생의 옹기 만드는 감각은 부친도 일찌감치 감탄한 재능이다. 옹기에 물고기 그림을 그리고 거북이 조각을 붙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 제작을 시도한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능에 타고난 예술성이 더해져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 옹기 장인의 이유 있는 고집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 산화납을 이용한 광명단 대신 나무를 태운 잿물과 청정수를 일정 비율로 섞어 숙성하고 정제한 천연 유약을 고집한다. 고운입자의 천연 유약을 발라 전통 가마에 나무를 때서 구운 옹기는 우수한 품질과 독특한 색감을 자랑한다.
상주의 질 좋은 흙에 깨끗한 물로 빚은 토기는 그늘에서 부드럽게 불어오는 미풍에 천천히 말려야 한다. 강한 바람으로 급히 말리면 갈라지거나 속에 실금이 생겨 불에 달궈지면 깨져버린다.
이처럼 옹기는 흙과 불로 만드는 것이라 불의 성질을 잘 살피고 불기운을 잘 다스려야 제대로 된 옹기를 만들 수 있다. 전통 방식의 장작 가마인 6칸짜리 연실요(連室窯)에 옹기그릇을 차곡차곡 넣으면 일주일 내내 불을 지펴야 한다. 집중과 몰입이 필요한 순간이다.
최대 1350도에 달하는 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담금질로 옹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이런 고온에서 만들면 대부분 뒤틀리거나 터져 25% 정도밖에 건질 수 없다고 한다.
광명단을 발라 600~700도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면 편하지만 사람에게 이로운 옹기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땔감도 소나무와 침엽수만 사용하고 다른 활엽수나 폐자재는 들여놓지도 않는다. 거기서 나오는 좋지 않은 색이 옹기에 배기 때문이다.
“옹기장이는 화기와 옹기의 상태, 공기의 흐름 등 가마 속을 훤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상주옹기가 강한 생명력을 갖는 순간이 바로 불을 땔 때이기 때문이지요.”
또 옹기가 우리민족의 음식인 김치를 비롯해 된장과 간장, 고추장 등의 발효식품을 담아 햇볕과 공기와 바람으로 깊은 맛을 내듯, 옹기도 발효과정을 거쳐야 한다. 석 달에 걸쳐 천천히 건조하고 차분한 숙성과정을 거쳐야 아름답고 단단한 옹기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아름답고 단단한 옹기가 모여 있는 상주옹기판매장의 입구로 들어서면 마치 야외 전시장 같은 마당이 나타난다. 너른 마당에는 반질반질 잘 구워진 옹기가 햇볕 아래 옹기종기 앉아있다.
정씨 가문의 옹기 만드는 기술과 함께 150년 넘게 집안 대대로 사용된 작업장도 자랑거리다. 목조 건물인 작업장은 안에서 피운 연기가 들보 나무나 지붕 짚을 자연스럽게 까맣게 코팅해 세월이 흘러도 비가 새지 않는다. 그런데 몇 해 전 이 작업장에 불이 났다.
작업장은 불에 타버리고 사라졌지만 대를 이어 내려온 상주 옹기의 역사, 그리고 전통을 지키고 있는 옹기장이 가족의 숨결과 내공은 여전히 이 터에 진하게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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