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부터 살충제 달걀, 생리대까지 잇따른 화학물질 사태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화학제품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정부의 사실 규명 전에도 소비자들 간 불안감이 크게 확산되는 양상이다.
소비자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등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정부의 충격적인 무능으로 정부에서 규제하는 화학물질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보고 해당 사안 파악에 적극 나서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사실 관계를 완전히 규명하기 전에도 문제가 된 사안에 대해서는 바로 대응하고 있다. 논란이 생긴 제품은 바로 폐기처분하거나 해당 회사에서 만든 제품 리스트를 공유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변모하고 있다.
한 여성 전용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한 네티즌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내가 잘못된 화학물질로 피해를 보면 나만 손해라는 걸 깨달았다"며 "정부가 조치에 나서기 전이라도 논란이 된 제품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소비자들의 변화 시기를 짚어보면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로 설명할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피부에 닿으면 문제 없는 세정제 물질을 호흡기로 들이마시는 제품으로 만들어 비극이 예견되어 있었지만 정부는 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94년 유공에서 만들어낸 물에 타서 쓰는 가습기 살균제 제품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제품임에도 정부는 판매가능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유공이 SK케미칼로 넘어간 이후에도 이 제품은 지속적으로 개발, 생산됐고 1996년 옥시가 이 제품을 본딴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낸다. 2000년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원료를 호흡기에 치명적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으로 바꿨다. 이 과정 중에 정부의 실험이나 검증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들어서 원인 모를 유아나 임산부의 폐손상 사망사고가 늘어났으며 2011년에 질병관리본부의 수사 결과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밝혀졌다. 정부는 제품이 생산된지 14년이나 지난 2011년에야 제품 유통 중지 조치를 내렸고 2013년에서야 피해자 구제 법안을 상정했다.
정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월말 기준 1.2단계 피해자는 377명으로 사망 161명, 상해 216명에 이른다. 여기에 관련된 업체만도 SK케미칼, 옥시, 롯데마트, 홈플러스, 애경, 이마트, GS마트, LG생활건강 등 셀 수 없는 지경이다.
이 같은 초유의 사태가 연이은 후에는 정부의 화학물질 규제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최근에는 정부보다 소비자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여론이 퍼지며 정부와 기업을 압박하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직장인인 이민하(41·여)씨는 "가습기 살균제 이후로는 정부에서 내놓는 규제를 믿지 못하겠다"며 "당하고 나서 사후약방문으로 규제가 바뀌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기엄마인 박현진(34·여)씨도 “모르면 나만 당한다는 생각뿐”이라며 “정부 발표가 나기 전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살충제 계란의 경우에는 정부가 살충제 계란 여부를 공개하자마자 소비자들이 계란을 모두 버리고 모든 계란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식약처가 ‘09’라고 찍힌 경기도 계란만 피하면 된다고 발표한 지 하루만에 전국 곳곳에서 살충제 계란이 적발되는 등 불신을 키웠다. 살충제 계란은 조류독감(AI)의 방역과도 관련되어 AI에 이어 살충제 계란까지 정부의 대응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낳았다.
릴리안 생리대도 여성환경연대가 지난해 10월 생리대의 유해성 여부를 조사한 뒤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지만 기업들과 정부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지난 8월에서야 여성까페를 통해 깨끗한나라 릴리안을 사용하고 부작용을 겪은 후기가 올라오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소비자들은 릴리안 생리대 환불과 유해물질 조사와 사용하지 않은 제품의 환불을 요청했다.
릴리안을 생산하는 깨끗한나라는 결국 유해물질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환불 절차를 실시했다. 식약처는 이제야 생리대 유해물질 조사에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미 생리대와 정부에 대한 불신은 심각한 상황이다. 소비자들은 해외 직구를 통해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친환경 생리대를 사용하거나 면생리대, 생리컵 등 대안 생리용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미리 대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쌓인 것 같다”며 "앞으로 질병이나 건강에 대한 이슈가 터질 때 정부가 더 빠르고 신속하게 대응하고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구현화 기자 ku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