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영화 ’오! 문희‘(감독 정세교) 속 두원(이희준)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관객에게도 좀처럼 신뢰를 얻기 힘든 인물이다. 한 번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불같은 성격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여섯 살 딸을 돌보는 것보다 노는 것에 더 심취한 두원에게 정을 붙이기란 쉽지 않다. 꼼꼼함이나 침착함과는 거리가 멀고, 주변인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두원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취직을 하고 결혼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오! 문희‘는 다소 거친 두원의 캐릭터에게 극을 이끄는 주인공 역할을 맡긴다. 제목이 가리키는 오문희(나문희)는 치매를 앓고 있어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동차 윤곽만 봐도 차종을 맞추는 보미(이준)는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두원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능수능란하게 관객을 설득하며 몰고가는 건 배우 이희준의 몫이다.
’오! 문희‘ 시사회와 개봉 직후 이희준을 향한 호평이 쏟아진 건 그가 어려운 임무를 잘 수행했다는 증거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이희준을 화상 인터뷰로 만나야 했다. 목을 덮는 긴 머리에 모자를 쓰고 나타난 이희준은 기자들의 화면이 전날보다 많이 켜져있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 할 이유가 없었다”며 처음 ’오! 문희‘ 대본을 받아든 순간을 떠올렸다.
“롯데시네마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시나리오라는 설명과 함께 대본을 받았어요. 깔끔하고 재밌었어요. 충청도 시골에서 엄마와 아들이 딸의 뺑소니범을 찾아낸다는 내용이었죠. 재밌는 요소가 많았어요. 관객도 좋아하고 나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거기에 상대 배우가 나문희 선생님이라는 거예요. 안 할 이유가 없었죠.”
이희준은 ’오! 문희‘를 찍을 때는 아이가 없던 시기라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을 표현할까봐 겁이 났다”고 고백했다. 최근엔 9개월 된 아이를 돌보며 ’어떻게 두원은 여섯 살 딸을 저렇게 키우지‘ 하는 생각을 한다. 존경스럽고 판타지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두원이를 얕봤던 것 같아요. 처음엔 시골에 사는 촌스럽고 무식한 인물, 어떻게 보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초반에 두원이 사는 집에서 촬영을 하다가 점심시간에 방에서 낮잠을 10분 정도 잤어요. 눈을 뜨니까 나문희 선생님과 엄마와 아들처럼 찍은 사진이 걸려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이 상황이 실제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두원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죠. 치매 어머니와 여섯 살난 딸을 돌보면서 회사도 다니잖아요. 어떻게 이걸 버티고 있지 싶어 존경스럽더라고요. 모자란 사람이라고 봤던 게 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극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어요. 두원이 3차 세계대전을 막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엄마와 딸을 지켜내는 게 중요한 영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 문희‘는 시나리오를 쓴 작가의 경험담에 기반한 이야기로 알려졌다. 실제로 금산에서 보험회사에 다닌 작가가 혼자 어머니를 모시고 딸을 키우는 두원 같은 상사와 함께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이야기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원의 집은 논산에서 실제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하는 인물의 집을 빌렸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희준은 다음날 수박을 사서 ’논산 아저씨‘의 집으로 찾아갔다.
“감독님과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이건 진짜 좋은 기회다 싶었어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갔다가 아침에 바로 논산 아저씨의 집으로 가서 인사를 드렸죠. 저를 잘 모르셔서 영화를 찍으러온 배우라고 소개했어요. 밥을 같이 먹고 자고 가라고 하셔서 아저씨가 양보해주신 옥장판 매트에서 잤어요. 이야기를 하다가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나가서 다시 눕혀놓는 모습이 정말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어떤 스트레스 없이 그 일들을 하시더라고요. 다음날 아저씨와 등산도 가서 계백장군 얘기를 몇시간 동안 듣기도 했어요. 그 경험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희준은 다른 작품을 할 때도 직접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며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영화 ’해무‘(감독 심성보)를 찍을 때는 여수와 거제도에 가서 어부들을 만나 술을 사며 인터뷰를 자처했다. 기획사에선 위험성 때문에 걱정이 많다. 하지만 배우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고 그들의 삶과 아픔을 생각해보는 것. 거기에서 느끼는 자극과 즐거움이 크고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연기는 계속 재밌어요. 제가 싫증을 잘내는 스타일이거든요. 연기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 계속 새로운 일인 것 같아요. 저 사람의 스트레스와 고민, 고통을 이해하고 뭐가 제일 즐거울까 생각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서 늘 재밌어요. 나문희 선생님처럼 나이가 80세쯤되면 어떨까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높을까요. 많은 사람을 이해하다가 죽는다는 게, 전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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