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는 대표적인 보수집단이다. 원로와 단체(병원)의 힘이 세다. 자본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마저도 무서울 것이 없다. 최근 전공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서울아산병원이 보여준 대응방식은 보수적이고 경직된 의료계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희롱·성추행 여부를 판단하는 제1원칙은 ‘피해자 중심주의’다. 사건의 특성상 이렇다할 물증이 없고 경제적·물리적 손실보다 정신적 충격이 주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공의 성추행 사건을 중재하고자 나선 병원 측의 조사과정은
‘가해자 중심주의’였다. 뒷자석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일에 대해 앞좌석에 앉은 남전공의의 증언을 토대로 교수의 무죄를 주장했다. ‘당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에 어떤 힘도 실어주지 않았다. 파견 나온 전공의보다 소속 교수를 비호하는 꼴이다.
소속 교수의 성추행 의혹이 기정사실화되자 병원 측은 서둘러 사건 진압에 나섰다. 파문을 일으킨 교수에 대해 감봉과 보직해임이 이뤄졌다.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빙상연맹은 문제의 코치를 퇴출시켰다. 몇 개월 감봉과 보직해임에 비하면 ‘파격적’이다. 이는 타성에 젖은 의료계가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하다.
회사 내 성추행 문제는 단연코 의료계에서만 벌어지는 고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의사의 윤리 의식을 고취시키고 관리·감독할 병원이 의사의 부조리한 관행이 드러날 때마다 형식적인 처벌로써 슬쩍 덮어버리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취재 결과, 병원 내 성폭행 예방교육은 지극히 형식적으로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번 성추행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도적 보완조치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규제를 강화할 곳, 새로 더할 곳을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병원 측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시늉만으로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연암 박지원은 ‘인순고식 구차미봉’, 이 여덟 글자로 천하만사가 무너진다고 했다. 인순고식은 낡은 관습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을 가리키고 구차미봉은 잘못된 일을 임시변통으로 구차하게 꾸며 맞춰 되는 모습을 뜻한다. 무서울 것이 없는 서울아산병원일지라도 이번 기회에 연암 박지원 선생의 조언을 새겨들어 일류 병원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다질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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