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밥 먹게 만원만 주세요” 유행처럼 번지는 ‘인터넷 구걸’

[기획] “밥 먹게 만원만 주세요” 유행처럼 번지는 ‘인터넷 구걸’

기사승인 2015-06-11 05:00:55
ⓒAFP BBNews=News1

“한 푼만 줍쇼”

지저분한 누더기에 덥수룩한 머리, 동정심을 자극하는 몸짓과 목소리. ‘구걸’을 생각하면 머릿 속에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도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더욱 그렇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구걸도 ‘현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장소만 바뀐 구걸 현장

인터넷 세상 속에 ‘구걸’이 자리 잡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SNS,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포털 사이트 서비스까지. 소통 매체가 늘어나자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구걸하는 자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례도 다양하다. 며칠 밥을 굶었다며 푼돈의 밥값을 부쳐 달라는 사람들부터 사채로 인해 가족들이 거리로 나앉게 생겼다며 목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도 있다.

최근 SNS에는 올해 26살이라는 한 여성이 본인은 발레를 전공한 사람이라며 발레 교습 레슨비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77만원의 레슨비 중 지인들에게 이미 빌린 50만원을 제하고 27만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그는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부모님이 안 계셔서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며 “불쌍히 여겨 주시면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자신의 몸매를 찍은 사진과 ‘(도와준다면) 데이트도 가능하다’는 문장도 첨부했다.

기막힌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 인터넷커뮤니티에 있는 ‘대출 갤러리’에서는 ‘변기통에 머리를 감으면 1000원을 준다고 해서 감고 왔다’는 충격적인 제목의 글이 게시되기도 했다. 작성자는 “만원이 아니라 1000원만 준다 해도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며 인증 사진과 함께 본인의 계좌번호를 적어 놨다. 대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게시판 본래의 취지는 없어진 지 오래다.

대형 포털사이트의 지식 답변 서비스를 이용한 익명의 네티즌은 갚을 돈이 있는데 이번 주까지 상환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섬뜩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사람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도와달라”며 “65만원만 빌려주면 신상과 관련된 서류란 서류는 모두 떼어 줄 것”이라고 전했다. 급한 마음에 올린 이 글에는 휴대전화를 할부로 구입해 매도하는 방법부터, 일수, 불법대출 등의 위험한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실제 ‘인터넷 구걸’ 경험이 있는 네티즌과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A씨는 “경제적 사정의 여의치 않아 끼니를 거르고 있던 차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연을 올렸고 상황을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먹을 것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처음엔 ‘힘들게 일 할 필요 없겠구나’ 생각이 든 건 사실”이라며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보니 계속 거짓말이 늘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터넷을 의지하게 됐다”고 짧은 말을 전했다.

점점 뻔뻔해지는 사람들

돈을 빌려주면 꼭 갚겠다는 ‘진부한’ 표현보다 좀 더 직설적인 화법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중고물품을 사고파는 인터넷 카페 ‘중고나라’의 일부 네티즌이 대표적인 예다.

1300만 명의 회원 수를 자랑하는 대형 인터넷 카페이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목격되는 기상천외한 일들은 일상에 가깝다.

카페에서 유모차를 팔려 했던 한 판매자에게 ‘어차피 필요 없는 물건이면 그냥 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를 정중히 거절하면 다음에는 욕설을 뜻하는 이모티콘이 날라 오기도 한다.

휴대전화를 중고거래 하려던 카페 회원은 “요즘 공짜 휴대전화가 얼마나 많은데 돈을 받으려 하느냐”며 “돈을 받지 말고 그냥 달라”는 반강제적인 요구를 들어야 했다. “때리는 대로 모두 맞을 테니 오토바이를 공짜로 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 구걸이 ‘국제 망신’으로 확장된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국 왕자이자 세계적인 부호인 만수르의 SNS에 일부 한국 네티즌이 구걸 댓글을 달아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만수르의 SNS에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소망부터 “치킨 사 먹게 2만원만 달라” “차 한 대 사 주세요” “2억만 대출해주세요” 등의 글을 남겼다. 은행명과 계좌번호를 남긴 사람도 있었다.

정도가 심해지자 한 아랍인은 “한국인에게 실망했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고 다른 한국 네티즌은 “국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여러 사람의 행위로 인해 기분이 상하셨다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현재 상황에서 평생 만날 일이 없으니 재미 삼아 구걸해보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 같아 3자의 입장에서 민망하다”는 사과의 글을 전했다.

“‘인터넷 구걸’, 현실보다는 가상공간에 의존적인 세태 반영된 것”

이에 대해 이재연 대신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치료학 교수는 “요즘 세대들은 현실이 아닌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더 의존적”이라며 “그러다 보니 자신의 상황을 현실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경제적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공부에 대한 강압을 많이 받았거나 본인의 어려움을 부모님이 해결해주다 보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터넷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성향이 생기게 된다. 인터넷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세대가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자화폐에 관한 심리분석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심리학 용어 중에는 ‘마음의 회계(mental accounting)’라는 단어가 있다. 마음의 회계는 물리적인 돈의 가치를 보다 낮게 책정해 돈을 쉽게 지출하는 경향을 뜻한다. 물리적 회계와는 반대되는 말이다. 물리적 회계는 1000원이면 1000원 자체의 교환가치만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의 회계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면 내 손안에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1000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카드’로 사용되는 1000원이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를 들 수 있다”며 “카드로 1000원을 사용할 때 훨씬 작고 쉽게 느껴진다. 나가고 들어오는 돈을 따져서 셈을 하는 방식에 마음의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크고 적은 돈을 쉽게 빌리는 이들의 행동도 ‘마음’에 따라 돈의 가치를 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수미 기자 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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