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섀도 대신) 갈색 색연필로 눈두덩이 윗부분을 칠해주세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화장 시연 동영상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앉았다. 아이의 손에 들린 물건은 형형색색의 색조 화장품이 아니라 미술 시간에 쓰는 색연필이다.
아이는 아이섀도우 대신 필요하다는 갈색 색연필을 눈에 갖다 대고 칠을 하기 시작했다. 심이 뾰족한 색연필이 자칫 눈을 찌를까 영상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불안을 넘어 초조하기까지 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여성의 영원한 관심사다. 나이는 중요치 않다. 예뻐지고 싶은 마음은 노소를 막론하고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장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 도구다.
문제는 이른 나이에 화장을 접하는 청소년들이다. 진한 눈썹,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을 한 교복 입은 학생들을 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중학생, 이제는 초등학생들까지 화장을 한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 오모(48)씨는 학생들의 화장은 이제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씨는 “화장을 청소년기에 있을 수 있는 반항과 일탈 정도로 보기에는 이미 도를 지나쳤다”며 “민낯으로 등교해도 진한 화장을 하고 하교를 하는 게 일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심지어는 수업시간에도 화장을 하고 앉아 있다. 수업에 들어가면 내가 고등학교 교사인지 대학교 교수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생들에겐 화장을 해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서울 소재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최모(15)양은 “친구들 모두 화장을 하고 다니는데 나만 안 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며 “다른 학교에서는 화장을 안 하면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소외되는 기분을 느끼기 싫어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에서 만난 고등학교 2학년 학생 김모(18)양은 “중학교 때부터 화장을 해서 이젠 민낯이 어색하다”며 “어른들이 ‘너희 나이에는 화장 안 한 게 더 예쁘다’고 말씀하시지만, 객관적으로 화장한 게 더 예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화장하는 게 불법도 아니고 화장품도 용돈을 아껴서 산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화장하면서 우리한테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불공평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최모(17)양은 “학교에 가야하는 평일에는 화장을 간단하게 하는 편이지만 주말은 조금 다르다”며 그 과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최양은 “세수가 끝나면 미스트(스프레이형 수분 공급 화장품)로 수분이 날아가지 않게 잡아준다. 이후 토너(스킨)로 피부 결을 정리한 다음 에센스, 수분크림, 아이크림을 발라준다”고 밝혔다.
이어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로 피부 표현을 하고 눈썹을 그린다. 아이섀도 여러 개를 같이 발라 눈에 음영을 주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 아이라이너, 마스카라를 사용한 후 눈물이 맺힌 것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반짝이를 애교살에 발라준다”며 “얼굴이 작아 보이는 효과를 주기 위해 블러셔로 턱 등을 처리하고 틴트로 빨간 물이 든 것 같이 자연스럽게 입술 화장을 한다”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이는 출근 준비를 하는 보통의 직장 여성들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한 작업이다.
초등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화장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 제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일부 화장품 회사에서는 이런 심리를 이용해 소비를 부추긴다. 학용품처럼 보이는 외관의 립스틱을 만들어 판매 중인 것이다.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하교하던 전양(11)은 “펜 립스틱을 필통에 넣어 다니면 선생님들도 이게 화장품인지 모른다”고 자랑했다.
또 “부모님이 립스틱 정도는 사주시지만 다른 화장품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며 “그래서 눈썹은 미술 시간에 쓰는 4B연필로 그리고 아이라인은 컴퓨터 사인펜으로 그리기도 한다. 이렇게 화장하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예뻐진 기분”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주대 심리학과 김은정 교수는 20일 “보통 청소년기에는 어른들을 따라 하려는 모방심리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학생들의 화장 문제가 더 두드러지는 이유는 다른 때보다 미디어의 힘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 등을 보면 청소년 또래의 아이돌 가수, 영화배우들이 메이크업을 하고 나온다. 이런 영향으로 아이들이 따라 할 모델들이 많아진 것”이라며 “의약품, 화장품, 생활용품 등을 파는 드러그스토어(drug store)의 증가로 저렴한 화장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만 튀게 되면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져 주된 그룹에 들어가려고 하는 집단 동조현상이 일어나는데 또래 친구들을 따라 화장을 하는 학생들이 이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피부과 전문의 이드보라 원장은 “피부과 테스트를 받지 않은 화장품이나 컴퓨터 사인펜 등은 알레르기나 피부 자극을 일으킬 수 있다”며 “어떤 색소의 경우에는 강도 조절이 안 되면 문신처럼 색이 남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또 “트러블이나 여드름을 가리려고 화장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잘못하면 화장품이 오히려 모공을 막아 여드름을 악화시키고 자극성 피부염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수미 기자 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