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발표안을 발표하자마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합병비율에 의문을 제기했죠. 제일모직 주식 1주당 삼성물산 주식 3주가 같은 가치가 되는 내용의 합병안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합리하다는 겁니다. 합병을 위한 주주총회 금지 가처분 소송까지 걸었습니다.
정체 모를 엘리엇의 등장이 몰고 온 파장은 컸습니다. 알고 보니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갖고 있었습니다. 삼성은 엘리엇의 존재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었죠. 엘리엇은 합병 계획 발표 전에도 삼성물산에 합병에 관한 질의를 했지만, 삼성물산 측에서는 당시 아직 합병 계획에 대해 논의되고 있지 않다고 대응했다고 합니다. 엘리엇이 자신의 실체를 드러냈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넘긴 것이죠. 삼성의 대응이라기에는 너무 허점투성이입니다.
지분율이 5%에 미치지 않으면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국내법은 엘리엇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어떻게도 이렇게 까맣게 몰랐을까. 삼성물산 지분을 여러 계좌에 쪼개어 담았다가 합병 직전 합친 것 같다는 게 삼성 측의 뒤늦은 추측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안다'가 전투의 기본인 것을 기억하면, 삼성으로서는 상대의 존재를 모른 상황에서 불리한 싸움을 시작한 셈입니다.
엘리엇이 합병비율에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세우자 삼성은 부랴부랴 합병한 이후의 시너지 효과와 지배구조 개편 등 합리적인 근거를 내밀고, 국내법상 합병비율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이 바로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날아가 외국계 투자자와 만나 직접 의견을 묻고, 조율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위력을 실감하고 나서야 주주 설득작업에 나선 것이죠. 하지만 이미 엘리엇과의 싸움이 시작된 채였습니다. 하루하루 엘리엇의 요구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엘리엇은 한술 더 떠 지난 4일 삼성물산이 가진 계열사 주식을 현물 배당으로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의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지분이 많은 삼성물산을 합쳐 삼성전자에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넓히는 것이 핵심입니다. 금 같은 삼성전자 주식을 배당한다는 것은 삼성 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죠. 결국은 삼성전자 때문에 합병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엘리엇이 삼성을 도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삼성물산이 최근 자사주를 KCC에 전량 넘기는 다소 위험하기까지 한 결정을 한 것은, 서둘러 이재용 부회장 중심으로 판을 완성해야 하는 삼성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이야기지요. 여기에 엘리엇은 자사주 처분 금지 가처분 신청을 거는 등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태가 '관리의 삼성'이라는 타이틀을 무색케 합니다. 시장에서는 삼성 리더십의 위기, 삼성식 위기관리의 한계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삼성의 앞날이 걱정이 되는 대목입니다. ku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