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에 김설진이 나온다고?”
김설진을 아는 일부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다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현대무용 분야에서 입지를 다진 그가 지상파 드라마에 출연해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설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식어가 필요하다. 세계적인 무용단 피핑톰 출신 현대무용가부터 Mnet ‘댄싱9’ 우승 MVP, 이효리의 춤 선생님, 콘서트 안무가 및 연출가, 그리고 이제 막 드라마 연기를 시작한 조연 배우. 9일 쿠키뉴스 본사에서 만난 김설진은 자신을 알아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이어 첫 드라마인 KBS2 ‘흑기사’를 마친 소감을 전하며 연기의 재미와 무대 연기와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텍스트 속에 존재하는 한 인물을 상상하고 이미지로 만들어서 구체화하는 작업이 너무 재밌었어요. 대본을 읽을 때 카메라 앵글에 어떻게 담길지를 만화책 프레임처럼 상상하는 것도 재밌었고요. 다른 인물도 또 연기해보고 싶어요. 기술적으로는 무대에선 몸을 쓰는 것들이 많은데, 방송에서는 인물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연기할 때도 있고 시선처리도 중요해요. 또 무대 연기를 할 때는 무대 전체를 신경 쓰게 돼요. 요즘엔 연출과 안무도 같이 해서 다른 출연자들부터 조명, 음향, 미술, 의상까지 신경 써야할 게 많거든요. 매체 연기는 오로지 제가 할 몫에 대해서만 신경 쓰면 되죠. 하지만 환경이 조금 다른 정도지, 무대 연기와 매체 연기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아요.”
드라마에 적응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그가 연기한 승구의 장면이 편집되는 경우가 많아 연기를 잘못해서 그런가 싶어 자책하기도 했다. TV에 나오는 자신의 연기를 아쉬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처음엔 내가 연기를 못해서 잘렸나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이틀 정도 힘들었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전 주인공이 아니잖아요. 굳이 내 역할과 분량에 대해 욕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 작가님이 이야기 흐름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계실 테니까 분명 이유가 있겠지 하고요. TV로 제 연기를 보면서 ‘왜 저렇게 했지’, ‘이렇게 할 걸’ 생각한 적도 많아요. 사실 현장에서 대부분 조연, 단역들의 장면 촬영은 빠르게 진행되거든요. 다시 찍자고 하면 저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게 되니까 아쉬워도 그냥 지나간 적이 많아요. 아마 제 욕심을 채우려고 했으면 한 장면도 못 찍지 않았을까요.”
김설진에게 그가 맡은 양승구 역할을 어떻게 분석했는지 묻자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다. 작은 단서를 통해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는 식이었다. 바가지 머리에 꽃가루 정장을 입는다는 설정을 보고 제 정신이 아닌 인물, 어쩌면 친구가 없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디자이너를 여성적인 성격으로 풀면 식상할 것 같아서 남성, 여성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 같은 인물로 접근했다. 또 15년 동안 샤론 양장점에서 일하며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연사하는 것을 목격했을 거라는 생각, 승구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샤론이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했다.
김설진이 양승구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깊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도 사람에 대한 연구와 상상을 많이 한다고 털어놨다.
“연기와 춤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춤추는 사람도 연기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전 춤이 인간의 몸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공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인간 자체에 대한 걸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연기라고 생각했죠. 또 무대 연기는 하는 순간 사라져서 안 남잖아요. 은연중에 뭔가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도 너무 해보고 싶었고요.”
김설진에게 ‘흑기사’ 출연은 새로운 경험을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계속 연기가 하고 싶고 누군가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발레를 했다는 배우 오드리 햅번과 최고의 발레리노에서 영화배우로 변신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언급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승구가 김설진이 연기한 수많은 캐릭터들 중 하나였으면 좋겠어요. 한 번 연기할거면 승구를 안 할 수도 있죠. 저도 멋있는 거 하고 싶잖아요. 하지만 승구는 제가 꺼낼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 하나니까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과정이기 때문에 멋있게 잘 나와야 한다는 욕심이 별로 없어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서 그냥 꾸준히 걸어가면 될 것 같아요. 나머지는 보시는 분들이 선택해주시겠죠.”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