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도 나는 내 몸에 이렇게 많은 수가 존재하는지 몰랐다. 내가 줄을 세운 적도 없건만 척추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 몸 곳곳에 세려면 셀 수 있는 기관들이 각기 하나, 둘 혹은 다섯씩, 자신을 드러냈으나 손가락을 접으며 더하기를 배울 때 이후론 별다른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화가 시작되고 몸 곳곳에서 고장 신호가 울린 요즘에서야 나는 내 몸의 수에 집중한다. 그리고 나는 그저 몸집이나 영혼이 아닌 과학이고 수였던 것을 깨닫는다.
이전까지의 나는, 열렬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늘 몸의 신호보단 감정의 흐름에 따랐다. 나름의 질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끌리는 대로 생각하며 살았다. 어찌 생각하면 내 삶의 방식은, 소설책을 읽고 자신만의 독후감과 반응을 허용하는 천상 '문과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이과적 노년으로 진로를 바꾸려 한다. 부쩍 몸의 숫자와 친해진 것처럼, 삶의 비율을 계산한다. 새로 산수 공부를 하듯이 가장 연습하는 문제는 마음을 줄이는 것이다. 가족은 물론 모든 관계에서 헛된 기대와 욕심을 버려 그에 따를 실망과 상처도 줄이려 한다. 관심과 간섭, 자율과 태만, 우정과 오지랖, 인간애와 호기심 등ᆢ 비율의 과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모든 경계를 생각해본다. 그럴 땐 노련한 재단사가 되어 마음도 행동도 적절히 가르고 싶다.
노년엔 늘리는 것보단 줄이고 버리라는 것이 많다. 식사량도 줄이고, 탄수화물량과 체지방도 덜어내고, 섣부른 기대와 헛꿈과 집착도 버리고, 말도 줄이고 짐도 줄이고…. 키우고 더하여 부피와 규모를 늘리던 젊은 시절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고 보면 노년 수학의 특징은 뺄셈, 곧 자신을 가볍게 하는 수학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산수가 수학으로 넘어가던 즈음, 가장 놀라웠던 수학 규칙은 마이너스 마이너스는 플러스가 된다는 것이었다. 현실에선 적자가 쌓여 흑자가 되는 일은 없어 도저히 맞지 않던 셈법이다. 그러나 노년엔 그것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게 될 듯하다. 비우고 줄이면 몸과 마음이 이로워지고, 덜어내고 베풀면 주변이 넉넉해질 테니… 또 기대를 줄여 실망이 덜하면 오히려 평안해지니 정말로 마이너스에 마이너스가 거듭하여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사는 건 대체로 어렵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삶이 만만하거나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내겐 좀 쉬워진 일이 있다. 여전히 지혜롭지도 너그럽지도 못하지만, 전보다 누구를 이해하는 것도 조금은 쉬워졌고 용서하는 것도 쉬워졌다. 잊기도 잘하니 저절로 집착도 줄고 포기도 쉽다. 사는 데 쉬운 일이 하나쯤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쉽진 않겠지만 나는 내 삶의 새로운 후반부를 준비한다. 건강도 삶의 방식도 이과를 택한다. 적절한 뺄셈으로 담백하게 나이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