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성현)을 배우 이병헌이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하고 싶어서다. 한때는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조하와 조하가 중학생 때 가출했지만 재회한 어머니 인숙, 그리고 인숙의 둘째 아들이자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진태. 이 세 명의 조합은 어떤 관객에게든 이후 이어질 이야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하지만, 그 세 명이 이병헌과 윤여정, 박정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하지 않아 좋았어요.”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병헌은 그렇게 말했다.
“시나리오를 쭉 읽어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냥 하고 싶다, 내가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겠다고 바로 말했죠. 웃음이 선을 넘거나, 눈물이 과잉되거나 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사실 이 영화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것은 끝내 해소되지 못하고 넘어가거든요. 그런데 그게 좋았어요. 영화가 인물의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인물의 숙제로 남겨두는 정서가 뻔하지 않았달까요.”
이병헌이 맡은 마흔 살의 백수 조하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인물이다. 잘난 부분 하나 없고, 과거의 영광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지금의 생활에 그 영광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 아는 것도 없는데다가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않아 무식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마음만은 선하다.
“제가 그간 연기해왔던 작품들과는 결이 달랐어요. 편안한 느낌을 가지고 연기했죠. 극대화되고 극단적 상황에 얽힌 인물을 맡게 되면 저는 상상에 의존해서 연기를 해야 해요. 그런데 조하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생활에 가까운 연기가 필요했죠. 그래서 좀 더 즐겁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대신 웃음이 나오는 장면에서 과잉적 연기를 하지 말자고 생했어요. 많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선을 넘어버리면, 관객들에게선 웃음이 아니라 억지 웃음, 혹은 쓴웃음이 나오거든요.”
연기 하면 내로라하는 세 배우가 만났다. ‘악마의 연기력’이라고 불리는 이병헌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 윤여정과 박정민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박정민의 경우 죽이 워낙 잘 맞았다고. “정민이는 워낙 연기를 잘하니까 제 주제에 충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동료로서 제가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하고, 의견을 구하기도 했죠. 워낙 믿음직스러웠으니까 가능했던 일이겠죠. 서로 깔깔거리면서 연기를 봐 주기도 하고요.”
20년 넘게 ‘믿고 보는 배우’ 혹은 ‘연기 잘 하는 배우’로 일컬어지는 기분은 어떨까. 이병헌은 한 마디로 “신난다”고 말했다.
“제가 취미생활로 연기를 하는 게 아니고, 직업이잖아요. 평소에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연기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고맙고 좋아요. 농담 섞어 말하자면 연기파 배우들 이름을 주워섬긴 기사를 볼 때 제 이름이 없으면 서운할 정도? 하하. 어쨌든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겠지만 연기라는 건 등수를 매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은 가능하겠지만 실제로는 누가 최고인지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모든 배우들이 스스로에게 프라이드를 품고 연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저의 연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자부심이 커요. 제가 한 연기에 관해 관객들이 엄지손가락을 올려주는 것. 그게 사실 제게는 가장 힘이 되는 일이죠.”
‘그것만이 내 세상’은 오는 17일 개봉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