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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지난 17일 오후 6시30분 필리핀 안티폴로시 심바한성당 앞. 분주한 퇴근시간에 빼곡히 거리를 채운 차량들이 내뿜는 매연 사이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 길다랗게 줄을 섰다. 몇몇은 밥벌이를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다 온 손을 흔들면서, 누군가는 하루종일 걷다 지친 검은 맨발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한국인들이 건네는 공짜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메뉴는 필리핀식 잡채로 불리는 ‘빤싯’. 서너살짜리부터 10대 소년까지 도시락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웠다. 낮동안 내린 폭우 탓인지 하수도의 퀘퀘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 했다. 조넬 에스피노사(13)군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온 뒤로 이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른다”며 환하게 웃었다.
한국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135인분의 도시락은 1시간도 되지 않아 동이 났다. 한그릇을 뚝딱 해치운 아이들은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고맙습니다”를 외치거나 봉사자들의 볼에 입을 맞췄다. 늦게 도착해 도시락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한 채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한국인이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동쪽으로 19km 떨어져 있는 안티폴로시에서 무료 배식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2월. 경기도 수원시 정도 규모의 이곳에 굶고 있는 ‘거리의 아이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민간 봉사단체 ‘행동하는 양심’이 자원봉사자 2명을 보내 정착하면서부터였다.
눈이 휘둥그레져 의아해던 현지 주민들도 이젠 아무런 거부감없이 감사의 표시를 건넸다. 한끼 식사를 위해 구걸하러 다니는 아이들을 모아주거나 감사의 표시로 ‘화이팅’을 연발하는 이도 있었다. 인근 시장에서 전자제품을 파는 알빈(40)씨는 “이 도시가 생긴 이래 외국인이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일은 없었다”며 “기적과 같은 일이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선행도 수개월 동안 생활비를 자비로 충당하며 이곳까지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된 공무원 자리도, 유명 일식 요리사도 포기하고 온 봉사자들은 하나같이 “삶을 버린 게 아니라 꿈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8개월째 봉사를 하고 있는 요리사 출신 이은정(30)씨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배식하고 의료 봉사하는 게 어릴 적 꿈이었다”며 “필리핀에서 간호사로 평생을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은 게 꿈”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행동하는 양심 필리핀지부를 지키고 있는 봉사자는 한국인 3명과 언어소통 등을 담당하고 있는 현지인 2명이 전부다. 일손이 부족한 날에는 인근 어학원을 다니는 한국 학생들의 도움도 빌리기도 한다. 그동안 다녀간 100여명의 봉사자와 소액을 기부한 수천명의 후원자, 현지인의 배려도 큰 도움이었다.
이들은 무료 배식 외에도 10평도 되지 않는 숙소를 교실 삼아 150여명의 빈민가 아이들에게 컴퓨터, 한글, 미술, 음악 등을 가르친다. 부녀자들에게는 직접 만든 생리대를 전달하기도 한다. 행동하는 양심 문관식 대표는 “필리핀에 사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무료급식센터를 세울 계획”이라며 “한국에 있는 많은 후원자들의 기부로 이뤄지는 이 센터는 필리핀 아이들의 명의로 운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안티폴로=국민일보 쿠키뉴스 글·사진 김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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