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손창섭의 日 투병기…노인병원서 치매 치료

[단독] 손창섭의 日 투병기…노인병원서 치매 치료

기사승인 2009-02-18 18:05:02
[쿠키 문화] 작가 손창섭의 도일(渡日)은 한국현대문학 사상 가장 극적인 증발에 해당된다. 그동안 ‘생사 미확인의 작가’ ‘아무 곳에도 없는 작가’라는 말로 불리워 온 손창섭은 월북 작가들의 생사마저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 생몰 연대 가운데 한쪽은 늘 비어있는 미궁의 주인공이었다.

30여년간의 불귀(不歸)로 인해 한때 도쿄 한국대사관 인근에서 그를 보았다는 소문마저 나돌았지만 그의 행적은 수수께끼로 치부되었다. 그도그럴것이 평론가 유종호로부터 ‘이상(異常) 심리학 교과서’라는 평을 들을만큼 충격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戱作)’(1961) 등을 발표하며 타의 추종을 따돌려온 그는 문학적 완숙기라할 1973년 홀연 도일한 이후 지금까지 국내와 소식을 끊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에서 한창 활동할 때에도 작품 활동 이외에는 매체나 지면을 통해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몹시 꺼렸다. 문단의 교우관계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그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문학도 그에게는 껄렁한 글줄에 불과했던 것일까. 대표작 ‘신의 희작’에 그걸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껄렁껄렁한 시나 소설이나 평론 줄을 끄적거린다고 해서 그게 뭐 대단한 것처럼 우쭐대는 선민의식. 말하자면 문화적인 것 일체와 문화인이라는 유별난 족속 전부가 싫은 것이다.”

지난 15일 도쿄 근교 히가시쿠루메시의 한 노인전문병원. 우에노 여사와 함께 찾아간 손창섭의 몸은 너무 야위고 손등은 거무튀튀한 게 혈색을 찾아볼 수 없어 젊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인기척을 듣고 눈을 뜬다는게 그나마 한쪽 눈꺼풀은 거의 붙어있었다. 싸늘한 침상에서 화석이 되어가는 듯 보이던 그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상체를 일으켰고 이어 팔과 다리를 주무르자 “이따이(아프다) 이따이(아프다)”를 연거푸 발음했다. 이때 우에노 여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만져서 아프다면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게 아니냐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에노 여사의 눈가는 이내 촉촉해져왔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지요. 고독한 분이지요. 그러나 나와는 대화를 했어요.”

휠체어에 옮겨 복도로 나오자 손창섭은 바닥에 닿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휠체어를 앞으로 밀고 나갔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말했다. “이 환자분은 중환 중임에도 의식이 돌아올 때는 우리에게 깎듯한 존대어로 말을 붙이곤 하지요. 우리 병동에선 가장 젊잖은 분이세요.”

설명은 들었지만 손창섭이 신음하듯 발음한 “아따이, 이따이’라는 단어에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말이 함축되어 있는 듯 했다. “아프다∼ 아파!”


아픔을 느낀다는 게 이토록 살아있음의 조건으로 상기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의 몸에는 일제와 한국전쟁이라는 지난 시대의 파경(破鏡)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손을 주무르면서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자 그는 불현듯 감긴 한쪽 눈을 마저 떴다. 침상에 누워있을 때와는 달리 다소 원기를 회복한 표정이었다. 옆을 지키고 있던 우에노 여사가 일본말로 입을 열었다.

“1949년 시모노세키에서 만나 결혼을 약조했지요. 나하고는 고교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제 위에 우에노 세이지(上野淸二)라고 오빠가 한 분 있었어요. 오빠는 남편과 교토대에 함께 입학해서 아는 사이인데 이듬해 두 사람이 니혼대학 문학부로 나란히 옮겨갈 정도로 친했지요. 그래서 친정이 있는 고오베집에도 놀러오곤 했는데 제가 24세때 시모노세키에서 다시 만나 결혼 약조를 했지요. 손 선생은 당시 부산에 있는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있었는데 그때는 어려운 시기라서 결혼식 같은 것도 생략하고 부산으로 따라갔지요. 전쟁이 끝나고 선생이 김동리 선생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후 서울 흑석동으로 이사를 가서 20여년을 꼬박 살았지요. 그런데 오빠가 날더러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거예요. 그때 흑석동에 집을 새로 지었는데 집을 팔아야 하는 문제로 선생은 2년간 더 머물다 건너왔어요. 순전히 내 고집으로 건어온 것이죠.”(우에노 여사는 손창섭을 ‘선생’이라고 호칭했다. 이는 손창섭이 교사 출신인데다 존경의 뜻을 담은 호칭으로 짐작된다.)

손창섭은 빈 손으로 일본에 왔다고 한다. 자신이 쓴 책은 물론 작품이 수록된 전집도 집안에 들여놓치 않았으니 그의 기이한 행적은 청빈과 겸허의 자기 실천이랄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손창섭은 비록 중환 중임에도 의식이 돌아올 때는 간호사들에게 깎듯한 존대어로 말을 했다고 한다. “선생은 직업을 갖지 않고 간간히 글을 썼지요. 그래서 내가 도쿄 명치기념결혼식 예식부에서 65세까지 일을 했지요. 일본에 건너와 처음엔 이바라키현, 미도구 아다치구로 거주지를 옮겨 한 3년쯤 살다 지금 사는 집을 분양받았어요. 이곳에서 꼬박 30년을 살았지요.”

그러나 정작 손창섭은 말이 없었다. 병상에서 확인한 것은 그가 아직 생존해 있고,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쿄=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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