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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이희호 여사가 만든 털장갑은 사랑과 인내 그리고 기적이었다. 그가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짠 털장갑은 쓸쓸하고 추운 감옥 생활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손과 발을 녹였다. 그 때마다 남편은 감옥에서 나와 곁으로 돌아왔다.
임종을 앞둔 김 전 대통령은 베이지색 벙어리 장갑을 끼고 이 여사에게 눈으로 이별을 고했다. 남편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병실에서 틈틈이 뜨개질한 장갑이었다. 이 여사는 장갑 낀 남편의 오른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 여사의 장갑 만들기는 엄혹했던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76년 재야 인사들과 ‘3·1 민주 구국 선언’을 주도한 김 전 대통령은 77년 3월 징역 5년의 형이 확정돼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 여사는 뜨개질한 조끼, 스웨터, 장갑을 보냈다. 이듬해 12월 김 전 대통령은 12월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이 여사가 직접 만든 옷과 장갑은 독서를 좋아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김 전 대통령만을 위한 맞춤용이었다. 80년 7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은 책을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이 여사는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손가락 끝이 벌어져 있는 진청색 장갑을 보냈다.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남편은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다시 석방됐다. 기적이었다.
사형수의 부인에서 영부인까지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극한의 고통·기쁨을 함께 나누며 47년간 동행했다. 고통의 순간마다 촘촘하고도 따뜻한 사랑의 장갑으로 동반자를 격려했다. 서거 당일 김 전 대통령이 낀 벙어리 장갑은 마지막 선물이었다. 글·사진=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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